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제77회 아카데미시상식 지상중계 [2] - 말, 말, 말
박혜명 2005-03-08

Inside Shot #2 파워 오브 블랙, 제이미 폭스모건 프리먼

샤를리즈 테론 | 남우주연상 후보 보시겠습니다. (후보 화면 지나가고) 오스카 수상자는, 제이미 폭스, <레이>. (객석, 기립박수. 폭스, 동석한 11살짜리 딸의 보글보글한 뺨에 입을 맞추고 무대 위로 오른다.) 제이미 폭스 | (수상소감 전략) 이 업계에 있다보면 여러 가지 다른 길로 쓸려갈 때가 있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그러죠. ‘다른 사람하고 일해보면 더 잘할 수 있지 않겠니, 피부색이 다른 사람 말이야.’ 하지만 17년이 지난 지금, (자신의 매니저들을 향해) 당신들은 내 가족과도 같아요. 바로 당신들을 향해 ‘아프리칸 아메리칸 드림’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객석의 오프라 윈프리, 불끈 쥔 오른주먹을 들어올리는 모습이 롱숏으로 잡힌다. 폭스, 수상소감을 아직 안 끝냈다.) 제이미 폭스 | (점점 수줍게 고개가 낮아지면서 감독과 스튜디오와 가족을 향한 감사 리스트 주절주절하다가) 오프라 윈프리, 할리 베리, 음, 그냥 당신들이 보여서 이름을 불러봤어요. (다시 고개 숙이고 트로피 만지작만지작) (카메라, 눈물 그렁한 윈프리와 벅찬 마음을 주체 못하는 듯한 할리 베리의 얼굴 클로즈업)

시상식 초반에 주어진 남우조연상을 모건 프리먼이 가져간 데 이어 제이미 폭스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제77회 오스카의 남자연기 부문상은 모두 흑인에게 돌아갔다. 오스카가 흑인에게 상을 주다니 신기하도다, 라는 표현이 우리에게는 이제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지만, 폭스의 수상소감은 그 진부한 명제가 할리우드에 몸담은 흑인 영화인들에겐 아직도 절실한 현재형임을 시사했다. 각종 외신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던 74회에 이어 올해가 또다시 할리우드의 흑인 배우들에게 기념비적인 해가 됐다면서, 남자배우 부문의 트로피 두개를 흑인 배우들이 모두 가져간 경우는 오스카 역사상 처음이라고 덧붙였다. 게다가 폭스는 <콜래트럴>로 남우조연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고, <호텔 르완다>의 돈 치들이 남우주연상 후보에 폭스와 함께 올랐으며 돈 치들의 부인 역을 맡았던 흑인 여배우 소피 오노케도가 여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남겨 네명의 흑인 배우가 세 부문의 후보 리스트를 고루 채운 점도 언급됐다.

74회 시상식 때는 남녀 주연상이 흑인 배우들에게 돌아갔다. 할리 베리가 <몬스터 볼>로 여우주연상을, 덴젤 워싱턴이 <트레이닝 데이>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유력한 수상후보였던 니콜 키드먼(<물랑루즈>)과 러셀 크로(<뷰티풀 마인드>)는 연기인지 진심인지 모를 미소를 띠며 카메라를 의식해야 했다. 할리 베리는 눈물로 뒤범벅된 채 “이제 유색인 여성들도 할리우드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오늘밤 그 문이 열렸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라는 힘있는 소감을 남겨 올해 오스카 홈페이지를 통해 네티즌들이 뽑은 최고의 수상소감 2위로도 꼽혔고, 덴젤 워싱턴은 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시드니 포이티어를 향해 환히 웃으며 “42년간 한 사람만 따라잡고자 뒤쫓았는데, 오늘밤 해냈군요. 시드니, 난 항상 당신 뒤를 따랐고 당신이 걸어온 길을 쫓아왔어요”라고 말해 할리우드 내 흑인 배우의 계보를 잇는 일도 잊지 않았다.

제이미 폭스는 가슴이 매우 벅찼던 까닭에 위의 소감 외에도 “나의 첫 번째 연기 코치”였다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을 털어놓느라 수상소감에 주어진 30초를 훨씬 넘기고 말았지만, 네번의 노미네이션 끝에 트로피를 쥐게 된 67살의 모건 프리먼은 젊은 후배보다 훨씬 담담했다. 수상소감에 흑인 배우로서의 자의식을 담지 않은 그는 “우리 영화에 어떤 형태로든 관계되었던 모든 분들께 감사한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애정으로 뭉쳐 일한 결과다”라고 짤막히 말하고 무대를 내려갔다. 그러나 자리로 돌아가서 한참 뒤, 객석을 훑던 카메라와 눈이 마주쳤을 때 프리먼은 양손의 트로피를 다시 한번 꼭 쥐며 얇은 미소와 함께 윙크를 던졌다. “나 드디어 받았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그 윙크가 무대 위에서 볼 수 없었던 진심을 대신하는 수상소감이 됐다.

Inside Shot #3 <에비에이터>의 저공비행,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로켓펀치

줄리아 로버츠 | 감독상 후보 보시겠습니다. (후보 화면 지나가고) … 오스카 수상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객석, 기립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무대 위로 올라와 줄리아 로버츠로부터 축하 키스를 받는다. 줄리아 로버츠, 마이크 앞에 선 클린트 이스트우드 입술에 립스틱이 묻은 것을 보고 웃더니 열심히 지워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 1993년에 (<용서받지 못한 자> 감독상 수상으로) 이 자리에 섰을 때 어머니가 함께 오셨었는데 오늘도 나오셨습니다. 그때가 84살이셨으니까 올해 96살이신데, 어머니가 가진 훌륭한 유전자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카메라, 아들만큼 정정한 정정한 96살의 노인을 비춘다. 노인, 손을 흔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 영화를 만들었던 지난 37일은 기름 잘 칠한 기계처럼 흘러갔습니다. 훌륭한 스탭들이 바로 그 기계입니다. (함께한 노장 스탭들의 긴 리스트를 읊다가) 우리 프로덕션디자이너인 헨리 범스테드가 89살인데, 그 사람이 우리 노인병리학팀 멤버의 우두머리입니다. (후략)(소감 끝나고 장내 진정되자, 더스틴 호프먼과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작품상 시상을 위해 무대 위로 등장.) 더스틴 호프먼 | 작품상 후보 보시겠습니다. (후보작 화면 지나가고)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오스카 수상자는… (봉투를 뜯더니 호프먼에게) 내가 안경을 안 가지고 와서 그러는데…. 더스틴 호프먼 | (수상자가 적힌 종이를 보고 스트라이샌드에게 귀엣말을 한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 당신에게 이 상을 주게 돼서 기뻐요, 클린트.(장내, 다시 한번 큰 기립박수가 터진다. 카메라, 스코시즈를 비출 틈이 전혀 없다.)

마틴 스코시즈

시상식 중반까지의 분위기는, 올해의 오스카가 <에비에이터>에 트로피 몰아주기를 할 듯이 흘러갔다. 단테 페레티는 “훌륭하고 훌륭하고 훌륭한 감독이에요, 우리가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이라고, 델마 스쿤마커는 “이 상은 내 것인 만큼 당신 것이기도 해요, 마티”라고 스코시즈에게 수상소감을 바쳤다.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케이트 블란쳇은 “고마워요, 마틴. 내 아들이 당신 딸과 결혼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에비에이터>의 감독과 주연배우는 돌아가는 상황에 한껏 고무됐다.

진 허숄트 박애상 시상과 장편 다큐멘터리 시상을 위해 각각 무대 위로 올랐을 때, 두 사람은 누군가 붙잡지 않으면 붕 승천할 것처럼 보였다. <타이타닉> 이후 두 번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혼과 신을 바친 영화에서 내심 수상을 기대했을 테고 그래서 후보 호명 때 찢어지는 입을 오므리느라 애먹었을 테지만, 네번 방문한 오스카 시상식장에서 물밖에 마신 기억이 없는 스코시즈는 더했을 것이다. 그는 시상식 전 인터뷰에서 “내가 처음 노미네이트된 이후로 대체 얼마나 흘렀습니까? 긴 시간이 흘렀죠. 난 상 안 타고도 계속 영화를 만들어왔어요. 신이 뜻하신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라고 말하면서도 “상을 받고 싶은 건 분명하다”는 전제를 달아놓았다.

그러나 경사는, 앞서 밝힌 것처럼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게 일어났다. 72회 아카데미 때 <소년은 울지 않는다>로 <아메리칸 뷰티>의 아네트 베닝을 제치고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힐러리 스왱크가 5년 만에 <빙 줄리아>의 아네트 베닝과 재회해 다시 트로피를 가져간 것이 서곡이 됐다. 길고 긴 수상소감을 고집스럽게 끌고간 힐러리 스왱크는, 영화 속 대사를 빌려, 감동적이면서도 사전에 준비된 것이 틀림없는 고백을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앞으로 바쳤다. “당신이 나의 모쿠슈라예요.”(‘모쿠슈라’는 영화 속에서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복서 매기(힐러리 스왱크)에게 붙여주는 닉네임이다) 이어 뒤뚱뒤뚱 예쁘지 않은 걸음걸이로 무대에 나온 줄리아 로버츠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름을 감독상 수상자로 또렷하게 불렀다. 로저 에버트는 “오스카 투표자들은 기술부문은 머리로 투표하고 주요 부문은 가슴으로 투표한다고 그러는데, <에비에이터>보다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더 감성적인 영화다”라고 수상 결과를 분석했다.

이번 수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오스카 통산 2회 이상 감독상을 수상한 18번째 감독이 됐고, 배우이자 감독으로서는 최초가 되었다. 한편 마틴 스코시즈가 이번에 세운 고배 다섯잔의 기록은 앨프리드 히치콕과 로버트 알트먼의 것과 타이를 이룬다. 페데리코 펠리니와 스탠리 큐브릭, 시드니 루멧은 네 잔의 고배로 이들의 뒤를 잇고 있다고 <버라이어티>가 알려왔다

Epilogue

제77회 아카데미시상식을 마무리지은 것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작품상 수상을 위해 앨버트 루디, 톰 로젠버그 등과 무대에 오른 이스트우드는, 두 사람의 긴 소감에 장내 눈치를 보다 로젠버그의 소감이 끝나기 무섭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시상식을 끝까지 지켜봐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라고 장시간의 쇼가 진짜 끝이 났음을 알렸다. 사회자 크리스 록의 “굿 나이트, 브루클린”보다 센 인사였다.

신선한 사회자를 영입하면서 시청률이 다소 상승할 것이라던 길 케이츠의 예상은 빗나갔다. 제77회 오스카를 시청한 북미지역 시청자 수는 약 4150만명. 지난해보다 5∼6% 감소한 수치다. 올해의 작품상 후보작 중엔 흥행수익이 1억달러를 넘는 작품이 단 한편도 없었다는 외신을 고려하고, 크리스 록이 매직존슨 극장에 나가 인터뷰한 일반 관객 중에는 작품상 후보작을 본 이가 거의 없었음 또한 감안한다면, 거대한 흥행작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이 독식하고 간 지난해 시상식에 비해 시청률이 낮은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희귀한 반전도, 박장대소할 유머도, 눈물을 쏟아낼 수상소감도 없었다.

비주요 부문 후보자들을 전부 무대 위에 올림으로써 수상자가 무대 위로 걸어나오는 시간을 줄이고 러닝타임도 3시간15분으로 짧게 끊었음에도, 제77회 아카데미시상식은 체감상 4시간에 가까운 쇼였다. 그 지루함의 이유는 아마도, 수상 결과를 읽어내기가 갈수록 쉬워지는 오스카의 보수적이고 노후한 기운 때문일 것이다. 올해 오스카의 주인공이 된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원래는 2005년 중에 개봉할 예정이었는데 워너가 오스카 수상 가능성을 점치고나서 지난해 12월로 미국 내 개봉일을 앞당겼더라고 한다. 만약 처음 계획대로 올해 중 개봉했더라면 후보 자격을 잃은 이스트우드 대신 스코시즈가 감독상을 가져가게 됐을까. 유구한 전통 속에 좀처럼 달라지지 않는 오스카를 보며 상상할 수 있는 반전이 현재로선 그 정도다.

오스카 시상식 내외·전후를 떠돈 말, 말, 말

“빨리 내려가고 싶어요”

앨버트 S. 루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제작 “내가 오늘밤 작품상을 수상하지 못하면 내 수상소감을 광고로 만들어서 내보낼 참입니다. 세번이나 연습했단 말이에요. 골든글로브 수상 때와 프로듀서조합 수상 때를 합쳐서. 그런데 그걸 실제로 써먹을 기회도 안 준다면 내가 너무 리허설을 많이 한 거잖아요.” -레드 카펫 행사 때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워런 비티/ 배우 “내가 입은 턱시도가 어디 거냐고요? 그걸 알면 내가 턱시도 사업 하고 있지!” -레드 카펫 행사 때 여성지 <Women’s Wear Daily>와의 짧은 인터뷰에서

폴 해기스/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각색 “아까 레드 카펫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소리치는 걸 분명히 들었다고요. ‘저기 작가들이 온다! 저기 작가들이 온다!’” -레드 카펫 행사 때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이름 모를 한 10대 소년 “지금 뮤직 어워드 하는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LA 코닥극장 곁을 지나다가 어느 기자에게

케이트 블란쳇/ <에비에이터> 배우 “그거, 힌트예요?” -시상식 전, 한 스탭이 입냄새 제거용으로 스피어민트 캔디를 건네자

랜디 톰/ <인크레더블> <폴라 익스프레스> 음향편집 “<반지의 제왕4>가 있었으면 우리는 상도 못 탔을 거예요.” -두편으로 동시에 노미네이트된 뒤 <인크레더블>로 수상소감을 밝히며

찰리 카우프만/ <이터널 선샤인> 각본 “29초, 28초, 제가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네요. (중략) 저는 시간 오래 끌 생각 없어요. 빨리 내려가고 싶어요.” -<이터널 선샤인> 각본상 수상소감 중

힐러리 스왱크/ <밀리언 달러 베이비> 배우 “그러면 안 돼죠, 아직 클린트한텐 말도 못했단 말이에요!” -여우주연상 수상소감이 하염없이 길어지는 걸 끊으려고 오케스트라가 끼어들자 버럭 소리지르며

케이트 블란쳇/ <에비에이터> 배우 “오스카가 내 인생을 바꿨냐고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런 바보!” -시상식이 끝나고 갈라 파티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감독·제작·배우 “오스카에서 나와 마티를 경쟁 구도로 몰아붙이려는 모양새에 다소 실망했습니다. 난 그 사람과 그 사람이 만들어온 영화를 매우 존경하거든요. <에비에이터>를 포함해서. 난 그저 아주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대중의 심상을 사로잡았다는 점이 기뻤을 따름입니다.” -시상식이 끝나고 무대 뒤 인터뷰에서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