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만 코닥 단편영화 제작지원 <마스크 속, 은밀한 자부심> <샌프란시스코 블루스> <처용의 다도> 당선
<씨네21>과 한국 코닥, 부산국제영화제가 주최하는 ‘이스트만 단편영화 제작지원제도’가 8번째 당선작을 발표했다. 49편의 응모작 중 선정된 세편은 허인 감독의 <샌프란시스코 블루스>, 정용주 감독의 <처용의 다도>, 그리고 노덕 감독의 <마스크 속, 은밀한 자부심>. 심사위원으로는 변영주(영화감독), 홍효숙(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 프로그래머), 김광수(청년필름 대표), 이성욱(<씨네21> 기자) 등 네명이 참여했다. 심사는 29분 이내의 단편 시나리오들을 제작기획서와 일정표, 포트폴리오와 함께 검토하는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해 진행됐다. 한국코닥으로부터 35mm 필름 1만 피트를 제공받고, 무료 현상 및 인화, 카메라 장비 대여, 편집 작업료 할인 등의 지원을 받게 될 이 작품들은 올해 8월 말까지 완성할 경우 부산국제영화제의 심사를 받아 와이드앵글 부문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편집자
소박하지만 유쾌한 공격 그리고 진정성
결국, 우리에겐 어떤 단편영화에 대한 강박증이 있다는 것을 항상 인정하게 된다. 가슴 시리도록 순수한 사랑은 이제 없다는 것을 알 만한 충분한 나이임에도, 세상을 배워가는 시간의 속도만큼 어떤 꿈같은 애정을 갈구하듯이, 우린 단편영화엔 반드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는다. 그만큼, 단편영화는 우리에게, 미래영화의 어떤 본보기이며, 무엇보다 진하고 청아한 원색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한다. 알고 있다. 그런 강박이 때때로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어떤 지독한 편견으로 가득 차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네명의 심사위원은 이런 편견과 지독한 애정으로 말미암아 흐릿해진 우리의 시선을 객관이라는 거짓된 합의로 숨겨버리거나 마음속에 담아두기만 하지는 않기로 합의하였다. 바로 우리의 이런 편견과 흐릿한 애정이 결국 함께 모아지는 어떤 시나리오가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런 애정을 확인해가는 즐거움을 향해 직진하듯 걸어가보는 것이야말로 단편영화에 대한 우리의 꿈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총 49편의 출품작 중에서 우리가 선택한 세편의 작품은 다음과 같다.
노덕 감독의 <마스크 속, 은밀한 자부심>은 육체의 관습, 혹은 관용어구들에 대한 소박하지만 유쾌한 공격이고, 흐뭇함이 느껴지게 만드는 진심 어린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 많은 출품작들이 성의 정체성에 대한 어떤 고민의 지점들을 형상화하려고 애썼지만, <마스크 속, 은밀한 자부심>만큼 뻔뻔하게 시침 뚝 떼고, 비관습적인 형상을 일상의 즐거움으로 변화시킨 작품은 없었고 또한 그것이 너무도 유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꾸밈은 정교했다.
허인 감독의 <샌프란시스코 블루스>는 일종의 성적 소수자 버디무비라고 할 수 있겠다. 뚱뚱하고 꿈만 많은 여성과 탈출을 꿈꾸는 귀여운 게이청년의 좌충우돌 현장 체험기 같은 이 시나리오는 자칫 어디선가 본 듯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의 관계란 함정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보거나 혹은 자신의 이야기임이 분명한 듯한 진정성으로 극복한 작품이다.
정용주 감독의 <처용의 다도>는 불륜에 관한 어떤 반성과 따스한 봉합을 그린 작품이다. 어쩌면 너무 낭만적인 것 아닌가라는 혐의를 품고 있을 정도로 <처용의 다도>는 사랑에 대한 반성과 헌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혐의를 순식간에 날려버릴 정도로, 자기 반성적인 감성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타인의 배신 안에 숨어 있는 자신의 죄에 대한 나름의 성찰은 이미 몇편의 단편영화를 통해 관계 안에 숨어 있는 자신의 숨겨진 어두움을 지속적으로 표현해왔던 정용주 감독의 특징이 잘 살아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시나리오의 완성도만을 이번 심사의 모든 근거로 삼지 않았음을 알려드린다. 프로듀서, 촬영감독, 미술감독 등 이 시나리오들을 영화화할 다른 책임자들과 감독과의 관계, 그들 개개인의 역량 역시 심사의 한 기준이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린 문자를 보고 감동받길 원한 것이 아니라 그 문자들이 켜켜이 숨어 있을 영화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변영주/ 영화 감독
“육체의 관습에 대한 유쾌한 딴죽”
<마스크속, 은밀한 자부심>의 노덕 감독 인터뷰
노덕 감독이 제출한 기획서에 의하면 <마스크속, 은밀한 자부심>은 3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다른 두편의 당선작들에 비해 빠듯한 제작일정임에도 막상 정확한 스탭 구성 및 캐스팅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이에 대해 감독은, “한번 늘어지면 대책이 없는 것이 영화작업인지라 최대한 긴장감을 가지고 작업에 임하고 싶어서”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제작을 완료할 계획을 세웠다고 말한다. 그처럼 단호한 결단력 때문일까. 인상적으로 봤던 단편 <둘의 밤>의 정재은 감독의 작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에 <고양이를 부탁해>의 홍보일도 마다지 않았던 그는 서울예대 졸업 뒤 몇년간 스크립터, 시나리오 각색 등 영화와 관련한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했다. ‘장류노’라는 시나리오 및 영화제작 비밀집단(?)의 일원으로 본인의 창작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실제 고민과 경험을 유쾌하고 기이한 판타지영화로 재구성한 이야기가 <마스크속, 은밀한 자부심>라고 설명한다.
-포트폴리오로 제출했던 <쭈쭈바>는 어떤 영화인가.
=고무줄 놀이에 끼고 싶은 소심한 아이의 몇 가지 시도를 보여주는 영화다. 쭈쭈바로 회유하려던 아이의 시도는, 더운 날씨로 인해 쭈쭈바가 녹아버리면서 실패로 끝난다는 일종의 블랙코미디다. 원래 코미디를 좋아하는데, 해맑은 웃음보다는 뒤틀리고 음침한 가운데 웃음을 유발하는 상황에 끌리는 것 같다.
-영화에서 발레를 소재로 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발끝에서부터 발레리나의 몸을 카메라가 훑어 올라가면, 그녀의 얼굴에 수염이 있는 이미지가 오랫동안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PD와 함께 이 이미지에 어울리는 내러티브를 고민하다가 생각한 것이 “내일 성전환 수술을 하는 발레리나 엄마의 모습을 비디오에 담는 남자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왠지 너무 착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원래 생각했던 여자의 수염 이야기를 살리고도 싶었다.
-남자처럼 수염이 난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일종의 판타지영화다. 판타지를 표현할 비주얼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음악이든 문학이든 모든 예술은 결국 타인의 세계를 경험하는 통로다. 이는 영화 역시 마찬가지인데, 관객이 영화의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판타지라는 화법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남자처럼 수염이 난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는 이 영화는, 제3자가 영화 속 인물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식의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을 살리고 싶다. 자주 등장하는 발레장면은 드가의 그림을 많이 참고할 것이다. 드가의 그림은 우리가 흔히 발레 하면 떠올리는 전형이기에, 그 익숙한 세계에 수염난 여자가 있을 때 느껴지는 이질감이 더욱 클 것 같다. 익숙한 가운데 느껴지는 낯섦이 판타지가 아닐까 싶다.
-무허가 진료실을 연상시키는 수술실의 암울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마치 낙태수술처럼, 모두가 암암리에 저지르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용납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어두운 세계로 그리고 싶었다. 인터뷰에서 밝힐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것도 있는 것 같다. (웃음)
<마스크속, 은밀한 자부심> 시놉시스
발레를 전공하는 ‘정’은 남자처럼 수염이 난 얼굴을 감추기 위해 언제나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남자친구 구철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위험한 제모수술을 만류하면서도 은근히 정의 맨 얼굴을 보기를 두려워한다. 왠지 불안해 보이는 어둠침침한 수술대에 누운 채 마취에 빠져드는 정. 수술실 전구는 수염난 팅커벨로 바뀌고, 정은 팅커벨을 따라 거리로 나선다. 거리의 모든 여자들은, 수염이 난 채 당당히 활보 중이다. 다시 마스크를 한 채 남자친구를 찾는 정은, 자신의 수염이 맘에 든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주저하던 끝에 수염이 난 정의 맨 얼굴을 목격한 남자친구 역시 그의 수염을 ‘멋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 정은 예쁜 발레복을 입고 수염이 난 멋진 모습으로 군무에 열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