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는다. 거짓에 상처받은 연인들은 진실이 마음을 치유해주리라고 믿지만, 차라리 흉터가 되도록 참고 참아야 했는데, 라고 진실을 듣는 순간에야 후회한다. 그 남자하고 잤어? 나보다 좋았어? 몇번이나 오르가슴을 느꼈지? 당신은 내 삶을 무너뜨렸어. 순결할 것만 같던 진실은 치졸한 의심으로 튀어나와 상처를 후벼파고, 자해나 마찬가지인 그 순간, 환상은 깨지고 사랑은 증발한다. 일흔 넘은 노장 마이크 니콜스가 연출한 <클로저>는 마음과 마음이 부딪치는 그 난투의 순간을 눈치채는 영화다. 니콜스는 “우리는 사랑의 처음과 끝만을 기억하고 그 중간은 편집해버린다. 거기에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겨난다. 우리는 사물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는가, 삶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는가”라는 말로 <클로저>를 설명했다. 수많은 사람 중에서 단 하나를 알아보았다고 해도 그 관계가 무너지는건 순식간이다. 최소한 순식간이었다고 기억된다.
작가를 꿈꾸는 런던의 부고담당 기자 댄(주드 로)은 거리에서 만난 앨리스(내털리 포트먼)와 첫눈에 사랑에 빠져 같이 살기 시작한다. 그는 뉴욕에서 스트리퍼로 일했던 앨리스와의 관계를 에로틱한 소설로 써서 출판하기에 이른다. 책에 들어갈 사진을 찍으러 스튜디오에 간 댄은 남편과 별거 중인 미국인 사진작가 안나(줄리아 로버츠)를 만난다. 또다시 첫 만남에서 사로잡힌 댄은 안나에게 구애하지만, 앨리스의 존재를 알게 된 안나는 매몰차게 그를 거절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다. 피부과 의사 래리(클라이브 오언)와 결혼한 안나는 오랫동안 물리쳐온 댄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실을 래리에게 고백한다. 댄과 안나는 함께 있으면서도 지난 관계를 떨치지 못한다.
1997년 원작 희곡을 발표한 작가 패트릭 마버는 그들이 진정 사랑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이 작품을 러브스토리라고 규정했다. “여기엔 많은 요소들이 있다. 성적인 질투, 남성적인 시선,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 하지만 이건 결국 단순한 러브스토리고, 대부분의 러브스토리가 그렇듯, 엇나가고 만다.” 그리고 그 사랑은 지독하게도 엇나간 나머지 어느 순간 경쟁과 복수에 압도당하기 시작한다. 버려진 남자의 마음속에 그녀가 아닌 그 남자가 들어앉아 행동의 방향타를 쥐게 된 것이다. 래리는 점점 더 강한 파장으로 댄이 맺는 관계에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을 단련시키고 변화시킨다.
<졸업>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등으로 숱한 관계를 탐구해온 마이크 니콜스는 눈물로 치장해야 마땅할 이별의 순간에도 본능을 파고든다. 틈을 주지 않고 안나를 추궁하는 래리는 처음엔 사랑으로 호소하지만, 안나와 댄의 섹스를 캐고들면서, 육체적인 폭력에 가까운 분노를 터뜨린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듯하고 래리보다는 유약한 댄도 다를 바가 없다. 안나가 댄과 잤는가, 그뒤엔 안나가 래리와 잤는가, 마지막으로 앨리스가 래리와 잤는가. 두 남자가 묻고 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이 질문들은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가고, 두 남자와 두 여자가 형성했던 폐쇄적인 원을 무너뜨린다. 그들은 언제든 짐을 싸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진실을 말할 수 없어 사랑하기를 그만둔, 앨리스 같았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안나는 댄 앞에서는 참고 있던 앨리스의 눈물을 사진으로 폭로했고, 래리는 앨리스의 진실을 거짓이라 비난했고, 댄은 오만하게도 그녀를 용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코미디로 분류되는 원작과 달리 묵직한 <클로저>는 섬광 같은 첫 만남과 질식할 것처럼 답답한 이별만이 존재하는 영화다. 그들이 행복했던 시절은 말로만 알 수 있다. 그리고 말은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서 짐작을 더해야만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는 댄은 정말 앨리스를 사랑했고 그녀와는 다른 방식으로 안나를 사랑했을까. 그는 어쩌면 끊임없이 사랑을 시작하기만 하는 건 아닐까. <클로저>는 그처럼 만들어지는 영화다. 자막이나 암시없이 시간은 도약하고, 사랑하는 과정없이 만남과 헤어짐만 있고, 닫힌 공간에 고립된 남자와 여자는 목격하지 못한 사건을 두고 서로의 마음을 할퀸다. 그 때문에 “나는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에 관심이 없고, 이 영화의 어느 누구도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관객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볼 것이다. 서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라는 마이크 니콜스의 부연은 감독이 흔히 하는 공치사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클로저>처럼 모호하고 정적인 영화에서 신경질적인 긴장이 배어나오는 건 글자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마이크 니콜스의 노련한 손길에 더해 네 배우의 상호작용 탓이 크다. 이 영화에서 이름을 가진 인물은 래리와 댄, 안나, 앨리스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연인이 모르도록 부정한 눈길을 주고받고, 온갖 감정이 들어차서 폭발하려는 원을 내리누르고, 그 많은 대사로도 하지 못한 말을 눈동자로 대신한다. 마이크 니콜스는 그들 사이에 놓인 공기만으로도 교감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한달 동안 네 배우와 리허설을 했다. 그 덕분인지 내털리 포트먼을 비롯한 네명의 배우는 스크린에 보이지 않을 때도 언제나 존재감을 유지한다. 악을 쓰며 싸우는 래리와 안나의 거실 어딘가에서 댄의 존재가 느껴지는 것은 시나리오와 연출과 연기가 서로의 영역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탓일 것이다.
사랑에 관한 잔인한 리얼리즘
연극 <클로저>
배우는 단 네명이다. 지나가는 행인2도, 엑스트라나 대역배우도 필요없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촌철살인의 대사가 빈 공간을 꽉 채운다. 어느 모로 보나 이 영화는 연극적이다. 1997년 영국에서 초연 뒤 브로드웨이로 건너간 작품으로, 당시 서른둘이었던 패트릭 마버의 작품이다.
마버는 옥스퍼드에서 평론가 테리 이글턴 밑에서 배웠다. 수줍은 성격을 벗어나기 위해 스탠드업코미디언이 되었다. 연극, 라디오와 TV를 오가며 작품을 했다. 첫 작품은 <딜러스 초이스>. 그의 취미이기도 한 포커 게임을 다뤘다. 두 번째 작품인 <클로저>도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썼다. 브로드웨이에서 우리 시대의 라신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솔직한 관계란 없으며 아주 잘해봐야 자신과 솔직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작가의 냉소적인 믿음과 등장인물의 믿음은 큰 차이가 없다.
대학로에서 4년 전 연인에게 걷어차인다는 뜻의 <차이다>라는 제목으로 올라 성인 관객을 오랜만에 끌어모으기도 했다. 여자로 가장한 남자와 또 다른 남자간의 음란채팅 장면을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등 당시로서는 신선한 구성과 재치있으면서도 자극적인 대사가 호응을 얻었다. 영화 개봉에 맞추어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연극도 다시 무대에 오른다. 이지나가 연출하고 박희순, 손병호, 김여진, 윤지혜가 나온다. 영화 못지않은 대학로판 호화 캐스팅이다(2월25일부터 3월13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97년 영국 공연을 본 뒤부터 작품을 만들 생각을 했다는 이지나는 이 작품의 매력이 사랑을 미화하지 않는 잔인한 사실주의에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심리묘사와 비주얼에 치중해 세련된 드라마가 되었는데 연극은 원작처럼 훨씬 속도감 있게 연출할 것”이라는 게 그의 이야기다. 이지나에 따르면 연극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는 알리스. 알리스가 고향인 뉴욕으로 떠나는 것과 달리 연극에선 알리스가 죽는다. 영화가 쿨하게 끝나는 반면 연극은 멜로드라마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