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관객에게 소구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어른들 세계의 축소판으로 그들 세계를 다루거나, 둘째 자신들의 (타락한) 세계와는 전혀 다른 ‘순진무구’의 세계로 다루는 것이다. 이는 모든 타자성을 다루는 방식에 다름 아니다. 여성을, 외국인을, 하위계급을 다룰 때도 같은 오류가 반복된다. ‘같다’와 ‘다르다’ 사이에서 타자성은 널을 뛰며, 동일자를 보편자로 승격시키거나 동일자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데 동원된다.
가령 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를 투사한 결과이며, 이 영화는 일종의 우화(寓話)로 기능한다. 한편 의 아이들은 ‘순진무구’의 결정체이며, 그들은 나쁜 어른을 교화시키기 위해 ‘자연의 교사’로 복무한다. 반면 향수 어린 ‘착한’ 영화라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의 아이들 역시 (‘여자를 구하는 기사도’와 심지어 ‘시어머니를 이해하는 며느리’까지 포함하는 센스!) ‘가부장적인 이성애’를 반복함으로써 영화는 ‘마초성’과 ‘종잡을 수 없는 년’을 유구한 전통(?)의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은 가히 의 ‘아홉살 버전’이다). 한편 의 아이는 ‘스몰 사이즈-어른’이지만,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서둘러 ‘부성 결핍’ 속에 가둬버림으로써 ‘순진무구’의 덫을 드러낸다. 즉 모순의 양극단 사이에서 진동하며 두 가지 오류를 겹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의 아이들은 ‘작은 어른’들도 아니고, 순진무구한 천사도 아니다. 그들의 학교에도 ‘계급’의 자장(磁場)이 드리워져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들 세계가 환원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의 애정은 ‘성차’를 포함하고 있지만, 가부장적 이성애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상호 조력과 증여로 이루어져 있다. 이 영화가 우리를 흐뭇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영화가 ‘착한’ 의도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좋은’ 방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영화의 미덕을 살펴보자.
현명하고 윤리적인 소녀 영희 vs 전대미문의 허허실실 소년 철수
자칫 밋밋할 수 있는 이 영화를 살려낸 것은 바로 캐릭터의 힘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총명하고 야무진 캐릭터, 영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똘망똘망한 영희는 전학오자마자 1등을 하고, 여자반장으로 선출된다. 그녀는 등에서 그려지던 남자아이의 눈길을 잡아채는 부잣집 애가 아니다. 오히려 핑크 망토 휘날리며 남자아이들 앞에서 ‘오버’를 떠는 유리는 이 영화에서 반성적으로 그려진다.
영희는 또래보다 작지만 민첩하고 영리하다. 또한 친구관계에서도 오도된 자만심으로 분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전학 온 첫날 “친하게 지내자∼ 우웩” 하는 철수에게나, “꽃집에서 먹고 자고 한단 말이니?” 하는 유리에게나 당당하게 대응하며, “풀이 묻어서 안 돼”라 하면 손을 닦고, 남자아이들에게 초경을 변명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서도 “무리일 것 같아”라며 담담하게 대답한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깊이 간직하면서도 할머니에겐 의연하게 내색하지 않는다. 망신의 위기에서 구해준 철수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며 먼저 공부 약속을 제안하고, 틀어졌던 철수가 약속을 상기시키며 간청하자 신의를 지킨다. 남자반장의 제안도 가볍게 뿌리치면서. 그녀는 IQ도 좋지만, EQ가 엄청 좋다. 그녀의 매력은 (의 계집애처럼) 예쁜 얼굴이나 비싼 옷이나 변덕스러운 ‘공주병’에 있는 게 아니라 그녀의 현명함과 어려움 속에서도 기죽지 않는 자신감과 신의를 지키는 윤리에 있다. 그녀는 소년이 보는 대상-소녀가 아니라 그녀의 이성과 의지와 감성으로 살아나가는 주체-소녀이다.
한편 영화가 진행될수록 비가시적이었던 철수 캐릭터가 부상한다. 그는 한번도 재현된 적이 없는 아이이자, 실은 우리의 머리 속에 가장 많이 저장돼 있는 불특정인이다. 그동안 학원물에서 (‘얄개 시리즈’ 이래) 남자반장 같은 ‘범생이’ 캐릭터와 더불어 ‘장난꾸러기’ 캐릭터는 꾸준히 등장해왔다. 그들은 워낙 창의적이거나, 반항의 표식으로 장난을 친다. 또는 (알고 보니!)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는 식이다. 그러나 철수는 그런 이유에서 말썽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의 몸과 정신이 학교라는 규율 장에 잘 맞지 않는 ‘산만한 아이’이기 때문인데, 그런 아이의 내면을 어른이 이해하기란 쉽지 않으며 의미로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재현도 어렵다. 그는 (마치 의 종두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다. 엉뚱하고 능청스러우며, 생뚱맞고 천연덕스럽다. 게다가 무엇보다 낙천적이다.
분명한 것은 그도 (종두처럼) 사랑을 안다는 것이다. 그는 재치를 발휘해 그녀를 위기에서 구하며, 남자반장으로 인해 서글퍼지는 상황에도 토요일 오후마다 교실에서 그녀를 기다린다. 급기야 자존심 다 버리고 “살려줘, 공부시켜줘” 애원하여 약속을 다시 얻는다. 기다리던 첫 시간, 유유자적 “빅 파이!”를 전하고, 함께 나오는 하굣길에 눈이 내리자 어설픈 춤을 추고, 가방을 빼앗아 달음질친다. 사랑의 기쁨에 들뜬 그는 그녀에게 가장 원하는 것을 선물하기 위해 살빠지게 노동한다. 그런 그가 누명을 쓰고 청소하던 장면은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가 소변기 위쪽까지 열심히 솔질하는 모습을 보았는가? 누가 억울하게 누명쓰고 고생고생 장만한 선물마저 빼앗기고, 벌로 청소까지 떠맡은 이 판국에, 청소의 삼매경에 빠져 평소에 잘 안 닦는 곳까지 솔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화장실신은 철수의 초연한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아무 생각없는 애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선승 같기도 하다. 또한 철수를 연기한 아마추어 배우의 연기 역시 그대로 생활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자연스럽게 어린이를 담은 ‘좋은’ 성장영화
성장소설 속의 인물들은 딜레마를 지닌다. 그들은 이야기를 쓰는 어른들로부터 ‘성장’이 부과된 ‘타자들’이다. 그러나 또한 이들은 소설 속에서 ‘성장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흔히들 이러한 모순을 1인칭 내러티브로, 즉 자신의 과거를 술회하는 방식으로 ‘대상’과 ‘주체’를 일치해 극복하고자 하지만, 과거가 현재에 의해 재구성되는 과정에서도 어김없이 의식적·무의식적 투사와 미화가 일어난다. ‘어른이 보는 아이’는 물론, ‘어른이 회고하는 아이’ 역시, 어른의 의식이 투영된 ‘유창하고 지적인 아이’이거나, 어른이 떠올리고 싶어하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고 만다. 연극은 소설보다 더 어렵다. 첫째, 1인칭 시점을 끌고 가기가 불가능하다(극이 되는 순간 본질적으로 3인칭 시점으로의 전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둘째, 아역배우의 연기를 제어하기 어렵다(그래서 아역을 키 작은 어른이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영화는 연극에 비해 용이한 면이 있다. 카메라의 시점은 연극의 3인칭 시점보다는 주관적인 시점을 가능하게 하며, 무수히 찍어 컷을 골라내는 방식이나 관찰과 포착을 통한 다큐멘터리적 촬영법은 서툰 아이들의 연기로도 원하는 화면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성공한 성장영화들로 등을 꼽을 수 있다.
는 디지털카메라를 통해 훨씬 용이하게 이에 접근하였다. 촬영비용을 낮추어 테이크 부담을 줄이고, 카메라의 무게감이 덜 느껴지는 상태에서 어린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표정과 동작을 찍을 수 있었다. 또한 편집, 음악 등 손쉬운 후반작업으로 영화의 질감을 다듬어나갔다. 디지털 장편영화 는 작위적인 어른의 눈으로 어린이를 대상화하지 않고, 그들(특히 철수)의 자연스러움을 화면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 ‘좋은’ 성장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