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talkin’ to me? ” 검은 화면에 조용히 이 대사가 흐르고 예고편의 성우는, 영화 역사상 가장 차가웠던 그 대사!, 라고 말하고 있었다. 가 제작 20주년을 맞이해서 새 35mm 프린트로 상영 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쩐지 감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 트래비스가 세상을 향해 매그넘44를 들이댄 지가 벌써 20년이 지났던가. 잠들지 않는 도시에서, 잠들 수 없었던 그 택시운전사가 “거리의 인간쓰레기들을 다 씻어 내리기” 위해 가스렌지 불로 손을 단련하고 몸을 만들던 그 순간을, 로버트 드 니로가 거울 앞에 서서, 이제 고전이 되어버린, 이 대사를 반복해서 지껄이던 그 순간을 다시 볼 수 있겠구나. 뉴욕의 영화광들에게 내려진 가장 큰 축복은 자신보다 먼저 세상에 태어난 영화를 비디오나 DVD가 아닌 스크린에서 만날 기회를 이처럼 자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일 테다.
그나저나, 요즘은 도시 곳곳이 스코시즈를 애타게 부르짖고 있는 것 같다. 의 재상영도 그렇지만 가 다운타운, 미드타운, 업타운에서 절찬리 상영 중이고, 재개관한 MoMA (뮤지엄 오브 모던 아트)의 부속 극장에서는 이라는 1974년작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기도 했고, 씨네마테크 필름포럼에서는 21일부터 스코시즈의 다큐멘터리 두편 (과 )을 묶어서 상영 할 예정이라니, 그럴리야 없겠지만, 마치 오스카를 겨냥한 미라맥스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은 스코시즈의 아탈리아계 부모 캐서린과 찰스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부모는 미국산 스위트홈의 주인공들이 아니다. 서로 별로 다정히 바라보지도 않고 심지어 캐서린이 소파에 가까이 앉을라치면 찰스가 옆으로 조금 자리를 옮길 정도다. 하지만 한 시대를 미우나 고우나 같이 살아 낸 이 부부가 만들어내는 심드렁한 듯 박자가 딱딱 맞는 대화는 '장소팔 고춘자 만담'보다 한 수 위다. (아, 이들은 의 에필로그에서 자신의 딸을 구해준 걸 감사하는 편지를 보내는 조디 포스터의 부모로 목소리와 신문 스크립에 등장한다.) 그렇게 아들은 묻고, 부모는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삶과 자신들이 개척해 낸 뉴욕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어머니는 그 와중에 어디서도 맛보기 힘들다는 미트볼 스파게티 소스 만드는 방법을 열심히 설명한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이 홈메이드 소스의 요리법이 상세히 제공되기까지 한다) 이 홈 비디오 같은 45분짜리 다큐멘터리는 얼핏 소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면면을 살펴보면 스코시즈 영화의 근원을 이해하는데 있어 더 없는 직설화법의 자료다. 스코시즈 역시 “언젠가 이 와 어떻게 대척 점에 있는지에 대해 분석해 놓은 흥미로운 이론을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여러모로 다큐멘터리가 극영화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사실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며 이 영화의 가치를 스스로 평하기도 했다.
42년생의 스코시즈도 그러고 보니 벌써 환갑이 넘어도 훌쩍 넘은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 ‘성난황소’의 펄펄한 기운은 나이와는 좀처럼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전작 에서도 그랬지만 하워드 휴즈의 생애를 그린 신작 역시 3시간 가까이 어찌나 가열차게 이야기를 몰아치는지 보는 사람이 힘이 빠질 정도였다. 나는 그의 영화가 늙지 않아서 좋다. 그가 계속 해서 위협을 가하고, 끝임 없이 유혹해서 좋다. 그땐 그랬지 라며 뒷방 늙은이 같은 회상조의 가락을 늘어놓지 않아서 좋다.
참,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스코시즈는 아직 한번도 오스카 트로피를 쥐어 본 일이 없다. 얼마 전 에 나왔던 그에게 오프라 윈프리는 “혹시 섭섭하지 않냐?”고 물었다. “어느 순간부터, 상 타는 일에 마음을 비우게 된 것 같다. 대신 나는 좋아하는 영화를 계속 찍으면서 살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다. 뭐, 어쩌겠나. 그래도 실망스럽긴 하더라” 라는 그의 솔직한 대답에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오는 2월 27일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다. 로 노미네이트 되어 있는 그가, 혹시 올해는 감독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혹 자신의 이름이 호명 된다면, 이 짙은 눈썹의 고집스런 노인네는 이렇게 궁시렁거리겠지. “누구? 누구? 내 옆엔 아무도 없는데, You talkin’ to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