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한 오페라 영화 장르의 성장이 정말로 가능할 거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80년대 초반부터 프랑코 제피렐리는 한창 전성기였던 플라시도 도밍고를 주연으로 내세운 일련의 오페라영화들을 만들었다. <라 트라비아타> <팔리아치> <카발렐리아 루스티카나> <오텔로>….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라 트라비아타>가 나왔을 때 비평가들의 호평은 여전히 기억난다. 여전히 그 작품은 썩 잘 만든 영화지만 당시 이 작품이 일으켰던 소란은 영화 자체의 질보다는 그 도전에 있지 않았나 싶다. 제피렐리는 그때까지 제대로 번역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오페라를 그럴싸하게 영화로 옮겼던 것이다. 테레사 스트라타스와 플라시도 도밍고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노래만 부르는 대신 말을 타고 달리고, 숲속으로 피크닉을 나가고 종종 필요한 경우는 입을 다문 채 보이스오버로 노래를 불렀다. 립싱크한 리허설 녹화처럼 보였던 이전 영화들과는 달리 <라 트라비아타>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짜 영화처럼 보였다. 와, 이렇게 만든다면 카라얀이 만든 시시한 오페라영화들 대신 진짜 그럴싸한 영화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오페라 영화화의 어려움 - 음악에 매인 채 원작 안에 갇히기 쉬워
당시의 낙천주의는 사라졌다. 요새도 오페라영화가 가끔 만들어지긴 하지만 <라 트라비아타> 당시의 열광은 없다. 심지어 주관객이어야 할 클래식 팬들의 반응도 그냥 그렇다. 이들은 잘 만든 영화 대신 실황중계 녹화를 선호한다. 어쩔 수 없이 후시녹음으로 일관할 수 밖에 없는 오페라영화들은 은근히 사기처럼 보인다. 립싱크를 하는 오페라 가수처럼 어색한 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 영화적 매력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녹화 중계의 현장감은 제피렐리 영화의 우아한 시각적 성찬을 쉽게 능가한다.
그러나 제피렐리의 오페라영화들이 힘을 잃은 건 더 근본적인 데 있지 않나 싶다. 그건 오페라가 결코 영화화될 만한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조셉 로지나 잉마르 베리만, 프랑코 제피렐리 같은 감독들이 주기적으로 흥미로운 영화들을 내놓는다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지금 와서 보면 제피렐리의 <라 트라비아타>도 뭔가 어색하고 모자란다. 도밍고의 연기는 아무리 봐도 무대식 과장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고 통풍된 장면들은 80년대 뮤직비디오처럼 촌스럽다.
오페라의 영화화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음악이 무대예술인 연극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연극을 영화화하는 어려움을 극단적으로 과장한 것과 같다. 오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이므로 우린 이 음악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감독의 권한은 기껏해야 몇몇 중요하지 않은 아리아를 삭제해 러닝타임을 줄이는 것밖에 없다. 그것만으로도 열성 팬들은 분노할 게 분명하고. 음악을 바꿀 수 없다면 연극은 당시에 만들어졌던 것과 거의 같은 모양으로 영화에 옮겨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연극과 영화는 공연예술이라는 것만 빼면 그렇게까지 유사한 장르는 아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도 다르고 호흡도 다르며 개별 예술적 요소들의 중요성도 다르다. 만약 감독이 원작을 충분히 해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다면 그는 원하지도 않고 취향도 아닌 장르에 갇혀버리게 된다.
<오페라의 유령>은 오페라가 아니라 웨스트엔드 뮤지컬이다. 물론 여기서 분명한 선을 긋기는 불가능하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가 이 작품을 통해 자기만의 오페라를 만들었다고 우긴다면 못할 건 없다. 장르란 어차피 이름 붙이게 마련이니. 중요한 건 이것이 뮤지컬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이 작품의 영화화가 베르디의 오페라를 영화화할 때와 거의 같은 문제점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은 보통 음악이 시작할 때부터 끝까지 흐르고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대사는 적다. 그리고 그 음악은 쉽게 바꾸거나 가사를 고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케스트레이션을 좀더 세련되게 하고 부분부분을 다듬을 수는 있지만 감독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뜯어고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결국 영화는 원작이 된 무대 뮤지컬처럼 제한된 공간과 연극적 상황 속에 갇히고 만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경우 베르디보다는 운이 좋다. 첫째로 작곡가가 여전히 살아남아 영화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작곡가의 동의하에 음악 자체가 변형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말이다. 둘째로 <오페라의 유령>은 특수효과를 잔뜩 동원한 80년대 오락물로 무대 전환이 베르디의 오페라보다 훨씬 자유롭다. 뮤지컬은 막을 내리지 않으면서도 기계장치와 연극적 마술을 통해 오페라 하우스의 무대와 팬텀이 숨어 있는 지하 호수를 오간다. 결국 이 말은 특별한 개작없이 원작 연극을 통풍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뮤지컬이라는 매체에 익숙한 영화감독이라면 근사한 오락물을 뽑아낼 수 있다.
조엘 슈마허의 기용은 실수
유감스럽게도 조엘 슈마허는 그런 감독이 아니다. 이 영화에는 치명적인 용병술의 문제가 둘 있는데, 하나는 팬텀을 연기한 스코틀랜드 배우 제라드 버틀러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감독인 조엘 슈마허이다. 버틀러의 문제점은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오늘은 슈마허에 집중하기로 한다. 사실 버틀러의 문제점도 분명한 한계 속에서 그럭저럭 열심히 노력한 배우보다는 그 캐스팅의 실수를 저지른 제작진과 감독의 책임이 크다.슈마허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가 연극 무대에 별 관심도 없고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는 비주얼리스트이고 영화쟁이이다. 그가 익숙한 세계는 카메라와 편집기 사이를 오가는 셀룰로이드 위의 환상 세계이지 무대는 아니다. 시작부터 치명적이다. 한번 오페라영화의 걸작들이나 할리우드 뮤지컬영화의 걸작들을 만든 과거 거장들의 경력를 돌이켜보기로 하자. <요술피리>의 잉마르 베리만, <세인트 루이스에서 만나요>의 빈센트 미넬리, <라 트라비아타>의 프랑코 제피렐리…. 이들은 모두 연극 경력이 있고 그를 통해 무대라는 공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심지어 최근에 <물랑루즈>를 성공시킨 바즈 루어만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의 영화들을 다시 보면 그들이 영화라는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만큼 무대 연극이라는 매체를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결국 아무리 원작을 새로 해석하려 한다고 해도 기본적인 뿌리까지 뽑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럴 생각이라면 차라리 각색을 포기하고 혼자 독립적인 영화를 만드는 편이 낫다.
슈마허는 기본적으로 <오페라의 유령>을 긴 뮤직비디오처럼 만들려고 한다. 바즈 루어만도 <물랑루즈>에서 그러지 않았냐고? 그렇긴 하다. 하지만 루어만은 그 현란한 편집 속에도 기본적으로 연극적인 인공적 안정감은 살려두는 예의는 있었다. 약 먹은 개구리처럼 펄쩍펄쩍 뛰는 정신없는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물랑루즈>가 단단한 예술적인 실체를 유지하고 있는 건 루어만이 가상의 무대를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마허의 경우 그런 바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전처럼 한다. 세트를 세우고 배우들을 등장시킨 뒤 찍은 이미지들을 영화적으로만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나쁘게도, 그는 연극으로부터 어떻게든 도망치려 하고 있다. 슈마허에게 연극을 영화로 각색하는 것은 연극적인 요소를 될 수 있는 한 모두 지워버리고 그 빈 공간을 영화적 장치들로 채우는 것이다.
연극적 매력을 영화적 장치로 허접하게 메꾸다
결과는 치명적이다. 한번 크리스틴이 팬텀에게 납치되어 그의 지하 아지트로 끌려가는 장면을 보기로 하자. 이 장면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긴 음악적 흐름에 의해 통제되어 있다. 해롤드 프린스의 연극에서도 이 장면은 특별한 장면전환 없이 한번에 간다. 하지만 슈마허 영화에서는 그 음악적 호흡이 끊겨져 있다. 크리스틴과 팬텀의 여정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마다 툭툭 끊겨져 있어서 도대체 음악과 함께 장면들이 흐르지를 못한다. 왜? 아마 그는 중간중간을 조금이라도 끊어주지 않으면 영화감독으로서 존재 의미가 날아가버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는 지금 되지도 않을 소재로 뮤직비디오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관습적인 통풍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라울이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크리스틴을 뒤쫓는 장면 같은 건 그냥 영화에서라면 괜찮았겠지만 전후 이야기를 고려해보면 그냥 어색하게 스토리의 속도를 떨어뜨릴 뿐이다. 여기서 하나의 교훈을 얻을 수 있으니, 연극에서 필요없다고 생각해서 제외한 것들은 대부분 영화에서도 필요없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다보면 이런 장면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생각해보면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건 모두 다 슈마허 자신의 실수들이다. 그는 무대만큼이나 연극적 연기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영화의 연극적 요소들이 별다른 대체물도 없이 그냥 사라지는 동안 원작의 연극적인 연기들 역시 제대로 통제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된다. 배우들은 열심히 하지만 연극과 영화 사이의 갭이 메워지지 않은 통에 그들의 연기는 방향없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영화를 보다보면 카메라 뒤에 있을 감독의 머리에 대고 “선택을 하란 말이야. 어정쩡하게 중간에 서서 머뭇거리지 말고!”라고 고함을 치고 싶기까지 하다. 슈마허는 이 영화에서 지금까지의 경력이 무색할 정도로 서툴다.
결국 이건 번역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여러분이 푸슈킨의 시를 번역하고 싶다면 한국어만큼이나 러시아어에도 능해야 할 것이다. 슈마허는 러시아어는 기초밖에 모르면서 영역본을 들고 푸슈킨의 번역에 매달리는 번역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영화 <오페라의 유령>에서 원작의 관객을 매료시켰던 연극적 요소들은 무신경한 번역가에 의해 대충 ‘중역’되어 있다. 영화는 여전히 꽤 재미있고 즐겁기도 하지만 이를 위해 슈마허가 한 일은 많지 않다. 관객이 이 영화를 즐겼다면 그들은 아마 슈마허의 방해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원작의 호사스럽고 야하고 천박한 매력을 발굴해내는 데 성공한 사람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