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은 이견의 여지없이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만한 한국 만화 최고의 스토리텔러다. 지겹고 부담스러운 이야기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흥미진진하게 윤색된다. 그러면서 원작의 풍미를 훼손하지 않는 탁월한 실력을 보여준다. 1972년에서 1991년까지 무려 19년 동안 <일간 스포츠>에 연재한 고우영표 극화는 수많은 고전 원작들을 재료 삼아 펼쳐낸 동아시아 역사와 지식의 성찬이었다. 그러던 그가 1993년 직접 자신의 발로 중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고 난 뒤 중국의 가장 기본적인 역사서인 증선지의 <십팔사략>을 10권의 단행본으로 발표했다. <십팔사략>의 원작은 700여년 전 송대의 증선지가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전한서>, 범엽의 <후한서>, 진수의 <삼국지>에서 위수의 <위서>, 탁극탁의 <송사> 등 총 18권의 중국 역사서를 정리한 중국 가장 기초적인 역사 교과서이다. 이야기는 창세설화인 반고 이야기에서 시작해 요순시대를 거쳐 춘추전국시대의 영웅들, 진시황의 천하통일과 항우와 유방의 초한전과 후한시대, 그리고 조조, 유비, 손권의 삼국시대를 통과한 뒤 남북조시대와 당나라를 거쳐 남송의 멸망까지 중국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우리가 언뜻 들었던 중국의 역사와 사상가, 영웅들의 이야기가 있다.
고우영 <십팔사략>은 단순한 중국 역사의 요약본이 아니다. 중국 역사를 다이제스트하지만, 원작이 갖지 못한 고우영식 이야기의 장점을 십분 살려 천연덕스럽게 고대의 이야기에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고, 빠르게 시간을 거슬러가며 핵심을 요약한다. 고우영다운 만화의 특징은 ‘템포의 조율’에 있다. 독자가 이야기를 이해하는 속도에 맞춰 역사를 늘리고 줄인다. 작화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인물들의 이미지를 창조하면서 가장 간략한 아이콘으로 그 인물의 특징을 잡아낸다. 마치 <삼국지>에서 고우영이 창조해낸 바로 그 유비와 관우, 장비가 다른 모든 <삼국지>의 주인공들을 대신해 그 시절 유비와 관우, 장비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70∼80년대에 보여주던 선보다는 더욱 간략해졌지만, 특징을 잡아내는 펜의 날카로움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렇게 간략화된 선만으로 모든 이야기를 끌어가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거침없는 붓의 터치가 나오고, 마치 <임꺽정>이나 <일지매>를 보는 듯한 사실적인 인물의 묘사도 등장한다. 이렇듯, 작가는 이야기와 작화의 모든 측면에서 템포를 조절한다. 황제의 왕궁이나 후원, 깊은 심산유곡도 그리 복잡하지 않게 몇개의 선으로 칸에서 묘사된다. 쉽게 도달할 수 없는 대가의 풍모다. <십팔사략> 10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어가다 잠깐 숨을 고를 때면 여러 극화에 감초처럼 등장한 관우의 깃털 ‘우’(羽)자를 함께 쓰는 예의 그 캐릭터가 등장해 나에게 말한다. “반만년 중국 역사에는 인간세상을 살아가는 이치가 있다. 나는 그걸 말하고 싶었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