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대한민국 영화대상의 백미는 <올드보이>도 <인어공주>도 아니었다. 설경구와 송윤아가 눈시울을 붉히고, 시상대에 오른 최민식과 전도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헌사를 바쳤던 그날의 히로인은 공로상 수상자인 팔순의 노배우 황정순이었다. 감격 속에서도 김진규, 김승호, 김희갑, 한은진 등 동료들의 이름을 차분하게 호명하는 그의 침착함은 시상식장의 모든 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영화여중 재학 시절 수학여행에 다녀와서 <타잔>을 보고 영화에 처음 시선을 빼앗겼다는 “우리의 어머니” 황정순은 열여섯의 나이로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에 입단하며 무대인생의 첫발을 내딛는다. <순정애곡>이라는 제목의 연극 데뷔무대에서 너무도 떨려 단 한줄 주어졌던 대사마저 거꾸로 낭독한 뒤 집으로 돌아와 펑펑 운 일은 이미 65년이 지나버린 아련한 과거사가 되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만주 순회 공연과 무대 뒤에서 스탭과 연기를 번갈아하는 고된 신입생활 끝에 곱게만 자란 반가의 외동딸은 서서히 배우의 틀을 만들어간다. 3년이 흐른 뒤 “두세편밖에 같이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최고의 감독”이었다고 기억하는 이용민 감독의 <그대와 나>로 은막에 신고식을 치른다.
올해 4월 이윤택의 연출로 국립국단 레퍼토리 1호로 되살아났고, 한국전쟁 직전 <원술랑과 낙랑공주>에 이어 그녀가 출연한 유치진 연출의 <뇌우>는 서울 장안을 술렁이게 한 화제작이었다. “덕수궁 앞까지 줄을 섰다”고 기억하는 <뇌우>는 7만5천 관객을 운집시키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이는 당시 서울 시민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수. “6개월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달랑 이불 두채”만 들고 떠났던 피난길에서도 재상연될 만큼 <뇌우>는 그녀에게 각별했다. 그녀를 “본격적인 배우로 만들어준 이해랑 선생”과 함께 공연했다는 점도 그러하다. “14살에 결혼하여 16살에 첫째오빠를 낳은 어머니를 고생시킨 것이 제일 마음아팠던” 기억도 있었지만 영화촬영을 위해 방문한 철도병원에서 만난 의사 이영복과 51년 10월 전쟁 중에 결혼한 일도 그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순간.
국립극장의 울타리에서 연극에 집중하던 그녀가 본격적으로 영화에 뛰어든 시기는 50년대 중반부터다. 처음에는 “연극의 프리마돈나가 스크린에서는 단역으로 전락한다”고 주위의 만류도 많았다. 그러나 걱정도 잠시. 그녀는 강대진 감독의 <마부>, 이형표 감독의 <새댁>, 정진우 감독의 <외아들>, 이강천 감독의 <혈맥> 같은 문제작에 연속으로 출연하며 무대에서 닦은 녹록지 않은 기량을 무기로 단숨에 연기파 조연으로 충무로에 자신을 각인시킨다. 연기 초기부터 어머니 역을 가장 많이 했을 뿐 아니라 당대의 여배우이자 친우인 최은희가 1965년 연출한 <민며느리>에서는 “그때부터 은희가 나를 일부러 시어머니를 시킬 정도로 어머니 역에는 익숙했다”고 언급할 만큼 배우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어머니’ 캐릭터에 관한 한 일인자임을 일찍이 검증받았다. 초겨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일상의 황정순은 25명의 자손을 거느린 말 그대로 이 시대의 ‘어머니’였다. 자손이나 문중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면서 손을 붙잡고 결혼 여부를 묻거나 따뜻한 차를 반복해서 권하는 자상한 모습은 1982년 KBS에서 방영된 <보통 사람들>에서 보여지던 할머니 역과 고스란히 닮아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다가 진태와 진석이 징집되는 대목에선 초등학교를 다닐 때 자신을 업고 다니던 작은오빠가 2차대전 징용에 끌려가던 기억 속의 풍경과 겹쳐져서 눈물이 솟구쳤다는 술회는 그러한 인간적 면모를 더욱 짙게 느끼도록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진 작은오빠에 대한 그의 애착은 당연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1960년대 말 그녀를 대한민국의 어머니로 인식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생긴다. 김희갑과 짝을 이뤄 연기한, 노부부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식들을 둘러보는 이야기를 그린 배석인 감독의 로드무비 <팔도강산>이 그것이다. 이후 <팔도강산>은 <속 팔도강산> <내일의 팔도강산> <아름다운 팔도강산> <우리의 팔도강산> <돌아온 팔도강산>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연작물로 자리하며 당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호응을 얻어낸다. 이 작품에서 김희갑과 황정순이 그리는 노부부는, 오즈 야스지로의 <도쿄 이야기>에 등장했던 자식들의 말소리보다 더 사뿐하게 움직이던 수줍은 류 치슈 부부와 대구를 이룬다. 사실 스크린의 황정순은 처음 영화에 입문하며 자신이 “좋아했고 우상이었던 일본의 전설적인 여배우 다나카 기누요”와 같은 원숙함과 선굵은 연기에 가까운 타입의 배우다. 연극무대를 기반으로 한 그녀의 정확한 발성과 시선 처리는 단순히 푸근함을 주는 가족들에 가려지는 통념적인 어머니상보다는 표현력을 강하게 드러내는 캐릭터에 더 잘 어울린다. 역할은 어머니지만 그녀는 김승호, 김희갑과의 호흡을 통해 대가족, 서민층의 ‘강인한’ 어머니를 그려냈다. 개인적인 연기스타일로는 미조구치 영화에서 다나카 기누요가 보여준 일상의 풍파를 견디는 초연함이 유현목 감독의 <김약국집 딸들>이나 <장마>, 이두용 감독의 <장남>에 출연한 그에게서 재발견된다.
“27년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다가 혼자되어 27년을 살았다”는 그는 서울예대 설립에 기여했고 황정순 장학회를 통해 후진양성에도 힘쓴 사려 깊은 영화인이다. 당대의 인기작 <팔도강산>에서도 자신이 돕던 학생들의 조언을 듣고 “후배”들을 위해 물러날 만큼 결단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 이면에는 “미국에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맏손자를 걱정하는” 일상의 할머니가 자리한다. “아들보다는 남의 집에 가서 살아갈 딸에게 평소에 용돈을 두배 줘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을 만큼. <장남>을 끝으로 은막에서 물러난 지 20년이 되었지만 사진을 찍을 때 “나이가 드니까 웃는 표정이 잘 안 돼. 이를 어째”라고 말하는 고운 모습에서는 아직도 현역배우의 기운이 느껴진다. “머리 위로 흘러내리는 뽀얗고 하얀 조명과 머리색깔이 조화롭게 보이는” 현재처럼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