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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주인공은 꼭 죽어야 돼?

자살·시한부선고 등‘죽음코드’ 유행 “한국드라마 상투성 심화” 우려 목소리

요즘 드라마에 타나토스(죽음의 본능)가 질주하고 있다. 주인공의 죽음은 공식처럼 수많은 드라마에서 핵심적인 극적 장치로 차용되고 있다. 사례는 넘친다. 한국방송 월화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무혁(소지섭)의 예정된 죽음에 이어, 은채(임수정)가 무혁을 따라 자살로 세상을 마감하는 설정을 놓고 작가와 제작진이 막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에스비에스 월화드라마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는 김태희의 죽음으로 후반부 극적 긴장을 높여갈 계획이다. 문화방송 수목드라마 는 주인공이 시한부 선고를 받고 갈곳없는 복수심에 사랑게임에 나섰다 진정한 사랑에 눈뜨고 숨을 거둔다는 얘기다. 에스비에스 수목드라마 <유리화>(사진)도 시놉시스를 보면, 김하늘을 놓고 사랑다툼을 벌이는 이동건과 김성수 중 한명이 세상을 떠난다는 설정이다.

움츠러든 사회분위기 반영?

타나토스의 범람은 지난 상반기 드라마 경향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파리의 연인>과 <풀하우스> 등 해피엔딩의 코믹멜로가 상반기 안방극장을 지배한 대표 장르였다. <애정의 조건> 같은 신파류 정통멜로도 죽음 코드까지 건드리진 못했다. 장기복합형 불황시대 침울한 현실을 잊고 판타지의 대리만족을 추구한 시청자의 심리가 배경으로 지목됐다.

일부에선 최근 죽음을 극 장치로 활용하는 드라마의 증가를 두고도 경기침체라는 사회적 현실을 원인으로 꼽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한층 움츠러든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황이라는 동일한 배경이 한때는 코믹멜로 창궐의 계기로, 이제와선 비극이 유행하는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논란 소지가 있다. 드라마 제작진 스스로도 사회적 요인보다 드라마 내적 논리의 변화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 경우, 죽음의 장치적 활용이 잦아진 이유로는 상식적이지만, 계절변화가 가장 먼저 지목된다. <유리화>를 기획한 구본근 시피는 “계절변화는 감성 변화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며 “드라마 분위기도 체감적으로 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이경희 작가는 “겨울에 방영된다는 점을 고려해 죽음을 통한 영원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리려 했다”며 “여름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돌아보면, 주인공의 죽음이 극 전개의 주요 모티브로 활용된 <발리에서 생긴 일>과 <천국의 계단>이 방영된 것도 겨울이 아직 끝나지 않은 지난 2월이었다. 이후 봄으로의 진입과 함께 경쾌한 코믹멜로가 안방극장을 휩쓸었다.

여름이었다면 달랐을 것?

그러나 계절변화가 비극적 정조를 띤 드라마의 유행으로 이어지는 연쇄고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왜 꼭 죽음 코드의 활용 일색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분석을 요한다. 이를 두고는 먼저 거시적 차원에서 드라마 시청층의 인구학적 특성을 지적하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구본근 시피는 주말극과 일일극 주시청층인 40~50대와 주중 트렌드극의 주시청층인 20대 이상 세대의 죽음에 대한 인식 차이를 든다. “40~50대를 시청층으로 하는 드라마는 아주 극적 개연성이 있을 때를 빼면 주인공을 잘 안 죽인다. 이 세대 시청층엔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다. 반면, 20대 이하 세대에게 죽음은 관념적이고 미학적인 문제다. 청춘 트렌디 드라마에서 죽음이 더 쉽게 문제해결 코드로 통용되는 이유라고 본다.”

한국 드라마의 다양성 부재가 겹쳐 벌어진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정성효 프로듀서는 “가을·겨울은 정통멜로로, 봄·여름은 가벼운 코믹멜로로 가는 게 일반적 흐름”이라며 “<파리의 연인> 같은 코믹멜로와 <겨울연가>류의 정통멜로가 아닌 다른 장르의 드라마가 없다는 점이 다른 선택을 어렵게 한다”고 덧붙였다.

20대에 죽음은 미학적?

<네멋대로 해라>의 인정옥 작가는 “한국 드라마는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데는 한계가 분명하다”며 “이 때문에 차갑고 음울한 계절에 유행하는 정통멜로에선 개인사의 가장 극적인 사건인 죽음을 장치로 활용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특히 지금 시점에서 죽음이라는 자극적 설정이 유행처럼 번진데는 지난 겨울 <발리에서 생긴 일>이 시도했던 충격적 결말(총기 살해와 자살을 통한 세 주인공의 죽음)의 영향이 작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인정옥 작가는 “준비기간을 고려하면, 최근 드라마는 거의 <발리…> 무렵 기획된 것으로 봐야 한다”며 “한동안 유행했던 코믹멜로와 차별화하려는 욕구가 죽음 코드의 전면화로 나타난 것”이라고 풀이했다. 정성효 프로듀서도 “발리 이후로 단순한 해피엔딩보다 죽음 등 충격적인 엔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경희 작가는 “무혁과 은채가 모두 죽는다는 설정은, 은채의 자살이 무혁의 외로운 죽음을 달래주는 진혼의 성격을 띠고 있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이는 극전개의 필연성에 따른 독창적인 결말이지, 발리를 답습하려 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죽음의 설정이 드라마의 관습 문법이 되다시피한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가뜩이나 출생의 비밀과 기억상실 등 식상한 공식들이 지배하는 한국 드라마의 상투성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구본근 시피는 “드라마에서 죽음이 남용되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면서 “전혀 현실적이지도 일상적이지도 않은 죽음이 단지 극적 흥미를 위해 도입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유리화>는 최근엔 (시놉시스와 달리) 남자 주인공 누구도 죽지 않는 결말 쪽으로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발리에서 생긴 일>의 자식들?

죽음도 불사하는 영원한 사랑, 그 비극의 여운은 길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죽음을 통해 수백년을 되새김하는 고전으로 남았다. 그러나 사랑을 가로막는 어떤 가족과 제도의 장애물도 갖지 못한 일부 드라마 속 연인들의 이유없는 죽음은 감동보다는 냉소를 낳기 쉽다. 가령 원작 <러브스토리>는 가족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한 뒤 아내가 숨지면서 비련의 감도를 극대화하지만, 한국의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는 뚜렷한 갈등의 제시없이 처음부터 여주인공의 죽음을 전제로 감동의 유발을 의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품게 한다. 그 간극은 결코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