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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드라마 리얼리즘 어디 갔소?

한국 드라마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나라 안에서는 방송사를 먹여살리는 콘텐츠로 시청자와 광고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나라 밖에서도 한류 열풍의 진원지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잘 키운 드라마 하나가 열 제조업 부럽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한국 드라마의 넓고 깊은 공백을 지적하는 목소리 또한 높아가고 있다. ‘상품’으로서 단기적인 성취는 이뤘는지 몰라도, 시청자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문화로서의 성취와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다. 당대 리얼리티의 반영이라는 문화의 핵심적 기능이 한국 드라마에선 거세된 영역으로 남아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장르 전화와 거세된 사회성

한국 드라마의 공백은 현실의 배제와 판타지의 적극적 추구라는 주제와 소재의 제한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지난달 2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선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티브이 드라마와 리얼리즘의 문제-현단계 티브이 드라마 진단과 제언’을 주제로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주최한 이날 토론회에서 이원재 문화연대 사무처장은 “드라마는 동시대의 규범과 가치, 사상을 반영하는 문화적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함에도 최근 한국 드라마에서 동시대의 역사적·사회적 사실을 발견하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런 현상은 무엇보다 장르적으로 트렌디 드라마의 전면화와 정통 리얼리즘 드라마의 퇴조라는 특징과 일치한다. 최진실과 최수종이 출연했던 1992년 <질투>를 계기로 한국 드라마는 트렌디 드라마의 거센 흐름에 휩쓸린다. 트렌디 드라마는 현대적 도시 공간에서 이뤄지는 매력적인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주조로 하며, 세대·가족간 갈등의 배제 내지 주변부화, 경쾌하고 호소력 있는 배경음악, 화려한 소품과 미장센, 이국적인 로케이션, 무겁지 않은 이야기 전개와 행복한 결말 등이 전형적인 특징을 이룬다(김영찬 한국외대 교수). 이런 트렌디 드라마는 신파적 멜로 중심으로 만들어지던 이전 드라마와 질적인 차별성을 드러내며 한국 드라마의 진화를 상징하는 장르로 자리잡는다.

1992년부터 시작된 흐름

그러나 트렌디 드라마의 전면화는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됐던 한국 드라마의 또 하나의 성과와 시도마저 묻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당대 정치·사회적 현실을 드라마 속에 담아내려는 리얼리즘 드라마의 노력들이다. <제3공화국>과 <땅> 등 김기팔(작가)·고석만(피디) 콤비가 대표하는 다큐멘터리형 정치·경제드라마가 현실의 가감없는 극적 포착을 목표로 했다면,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은 멜로의 극적 구조 안에 추악한 현실의 수레바퀴에 깔려 스러지는 당대 젊음의 욕망과 이상을 비극적 정조로 그려냈다. 이런 리얼리티를 간직한 드라마를 요즘 안방극장에선 더 이상 만나보기 어렵다. 정통사극을 제외하면, 문화방송 <영웅시대>가 유일하게 이런 계열에 속한다. 한국 드라마의 공백은 이미 장르적으로 구축된 상태다. 김승수 전 문화방송 드라마제작국장은 “억압적 현실 아래서 오히려 현실을 포착하려는 드라마가 만개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장르 안의 의미화도 미미

2004년 한국 드라마의 트렌디 장르화는 거의 완료된 것처럼 보인다. <천국의 계단> <발리에서 생긴 일> <백설공주> <파리의 연인> <풀하우스> <미안하다, 사랑한다>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등 주중 미니시리즈는 트렌디 드라마로 오로지된 형국이다. 다른 한 축을 형성하는 사극과 시대물도 <대장금>이나 <다모> <해신> 등 퓨전형의 현대화한 모습이 두드러진다.

장르 전화와 함께 문제제기의 축도 옮겨간다. 트렌디 드라마가 담아내는 현실의 협소함이 그것이다. 트렌디 드라마는 성격상 정치나 사회현실의 직접적인 반영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사회적 위치의 미묘한 흔들림을 전면에 내세운 <나는 달린다>의 상업적 실패는 트렌디 드라마가 트렌디 드라마의 문법을 벗어날 때 내몰릴 혹독한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요즘 한국 드라마는 그 수준에서나마 가능한 사회적 의미화마저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한국 드라마는 현실에 눈감은 ‘하이퍼-리얼’적 태도를 고수해왔으며, 심지어 ‘하이퍼-리얼’적인 미학적, 장르적 실험조차 불성실했다”(이원재 사무처장)는 것이다.

신데렐라 스토리의 의미있는 재해석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단적인 사례다. 재벌과 하층 계급 여성 사이의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는 한국 트렌디 드라마의 가장 기본적인 멜로 구조다. 그럼에도 계급의 부딪침을 극적 긴장 요소로 활용하는 드라마는 거의 없다. <발리에서 생긴 일>이 유일한 예외가 될 터이다. 재벌 2세 조인성과 박예진, 가난한 엘리트 소지섭과 달동네 신데렐라 하지원 사이의 얽히고 설킨 연애 이야기는 단지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고, 자본주의 계급갈등의 맥락 속에 재배치돼 새로움을 빚어낸다.

<네멋대로 해라>도 “우발적 사건”

김영찬 교수는 “트렌디 드라마가 문화적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던 가벼움의 미학에 상당한 균열을 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문제는 이게 어쩌면 유일한 예외라는 것이다. <발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드라마의 상상력은 신데렐라 스토리의 완성이라는 ‘판타지’에 매몰돼 있으며, 계급적 현실의 성찰로 이끄는 장르 안의 실험은 지속되지 않는다. <발리…>는 트렌디 드라마의 진화라기보다는 예외적 돌출로 이해된다.

물론 한국 드라마가 변화하는 현실에 완전히 눈감았던 것만은 아니다. 기성가치에 얽매이지 않는 신세대 젊음의 자유주의 선언 <네멋대로 해라>를 필두로, 최근 트렌디 드라마들도 당당하고 꿋꿋한 캔디형 여성상 등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은 “의도하지 않은 예외적 작가 및 관객의 마주침이거나 수용자의 자기해석에 의존한 우발적 사건”(이원재)이라는 한계에 갇혀있다. 나아가 김영찬 교수는 “트렌디 드라마들이 전통적인 멜로드라마 못지 않게 전형성에 매몰돼 있으며, 성차, 전통, 가족 이데올로기들을 재생산해내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트렌디 드라마의 진화와 한류 드라마의 광휘에 찬탄하기에 앞서 증발해버린 현실의 복원에도 눈길을 돌릴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