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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주제작사 홀로서기 ‘사전전작’ 뜬다

드라마 제작 시스템 ‘변화의 바람’

드라마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 드라마 생산자일까, 유통업자일까? 한국 드라마 제작 시스템이 중대한 변화의 갈림길에 섰다. 방송 편성권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방송사가 여전히 압도적인 우위에 있으나, 최근 외주 제작사들이 ‘사전 전작 드라마’를 들고 나오면서 변화의 낌새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전 전작 드라마가 어떻게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조건으로 방송되느냐에 따라 한국 드라마 제작 시스템이 획기적으로 바뀔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점쳐진다.

에이트픽스 <비천무> 기획·촬영·배급까지 직접 “저작권은 우리가”

외주 제작사인 에이트픽스는 최근 중국 현지에서 100% 사전 제작한 24부작 드라마 〈비천무〉(사진)를 들고 나왔다. 〈비천무〉는 재원과 인력, 장비 등을 외주 제작사가 모두 자체 조달해 만든 명실상부한 최초의 사전전작 드라마다. 기획단계부터 방송사가 참여해 미리 편성을 짜고 제작비와 인력, 장비 지원까지 받아 촬영에 들어가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났다. 〈비천무〉는 한-중 합작으로 제작비 80억원을 들여 완성했고, 이미 중국 쪽 배급은 마친 상태다. 이제 남은 것은 국내에서 어떤 조건 아래 어떤 방송사에서 방영되느냐다. 제작사 쪽은 방송사에 국내 방송권만 판매하면서 회당 1억여원을 받아내겠다는 태도다. 국외 판권 등을 이용한 추가 수익을 통해 수지를 맞추고 나아가 앞으로의 수익구조 자체를 안정적으로 바꿔나가겠다는 목표다.

이에 대해 편성권을 쥔 방송사는 달갑지만은 않은 표정이다. 방송 광고 수익이 갈수록 떨어지는 상황에서 그나마 ‘돈이 되는’ 국외 판권 등 드라마 저작권을 쉽게 놓아줄 리가 만무한 것이 현실이다. 방송 3사가 드라마를 구입하지 않아 방영되지 못한다면 제작사의 수익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를 잘 아는 방송사가 ‘사전 전작 드라마 길들이기’에 나설 수도 있는 대목이다.

아니나 다를까 방송계 일각에서는 “한 방송사의 제안으로 지상파 3사가 담합해 〈비천무〉 비토에 들어갔다” “값 낮추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황당한 소문도 나돌고 있다. 최근 〈비천무〉 시사회에서 송병준 에이트픽스 대표는 “방송사들의 반응이 다양하지만 〈비천무〉의 계약조건이 앞으로 사전제작 드라마에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고 털어놨다. 아직도 드라마 외주제작사의 갈 길이 멀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슬픈 연가>,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 절반의 실패

현재 에스비에스에서 방송되고 있는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도 애초에 사전전작을 목표로 준비됐다. 〈비천무〉와 다른 점은 제작과정에서 이미 에스비에스가 방송사로 결정됐다는 것뿐. 제작비 조달과 제작 인력, 장비 등은 모두 제작사가 감당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제이에스픽쳐스와 로고스필름이 50억원을 투자해 미국에서 100%를 완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8부까지만 촬영을 마치고 최근 귀국했다. 일정에 쫓긴데다 현지 촬영과 스타급 배우들의 높은 출연료로 제작비가 초과 지출됐기 때문이다. 결국 애초 계획과는 달리 에스비에스의 지원을 받아 국내 촬영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저작권도 방송사와 함께 나눠 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이진석 제이에스픽쳐스 대표는 “저작권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될 것이 아니며, 정답은 (드라마를) 다 만들어 놓고 방송사와 함께 보면서 협상하는 것”이라며 “자본과 좋은 기획, 대본이 사전에 준비돼야 하는데 아직 그렇지 못한 것이 실정이며, 국외 판매 시장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할 땐 방송사의 허락 없이 작품을 만들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러브스토리…〉는 현재 국내외 방송권 등 20여개에 이르는 저작권을 어떻게 나눌지를 놓고 에스비에스와 협상을 벌이고 있다.

내년 초 문화방송 방영이 예정된 〈슬픈 연가〉도 〈러브스토리…〉와 비슷하다. 김종학프로덕션·포이보스·두손엔터테인먼트가 76억원의 제작비를 대고 사전 전작을 목표로 제작이 시작됐다. 그러나 뒤늦게 송승헌이 중도 탈락하는 등의 이유로 촬영이 늦어지면서 방영 일정에 맞춰 사전 제작을 마치는 것은 꿈도 못 꿀 형편이다. 이에 따라 저작권 등과 관련해서도 기존 드라마 계약 방식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근 일본 쪽 판권을 역대 드라마 수출 최고액수인 48억원에 수출 계약을 하면서 체면은 지킬 수 있었다.

편성권 쥔 방송사들 변화수용 할까 말까 촉각

사전 전작을 목표한 드라마는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 방송사가 기획해 발주한 드라마를 방송사의 지휘 아래 방송사의 인력과 시스템에 기대어 외주 제작사가 만든다. 적은 제작비와 함께 방송사가 거의 독점하는 저작권 문제에서 외주 제작사가 큰 소리를 낼 수 없는 까닭이다. 사전 전작을 통해 저작권을 보유하려는 외주 제작사의 의지도 미약하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좀더 수준높은 드라마 제작 환경을 만들 의지는 작은 반면, 당장 눈앞의 금전적 이익에 따라 저작권을 손쉽게 내줄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한류 열풍을 타고 국외시장이 넓어지면서 〈비천무〉와 같은 ‘완제품 드라마’ 제작이 늘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국산 드라마의 콘텐츠의 가치는 높아지지만 정작 드라마를 만든 외주 제작사들은 방송사에 견줘 혜택을 적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겉만 번지르르하지 않은, 작품성 뛰어난 드라마의 사전 전작을 전제로, 방송사 또한 새로운 드라마 제작 시스템에 맞춘 인식의 전환을 이뤄야 할 시점이 왔다. 외주 제작사에 견줘 압도적 힘을 보유한 방송사가 드라마를 거저 먹으려 드는 판국이라면 방송위원회라도 나서 ‘저작권 보유주체’의 제도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한류 열풍의 호기가 방송사와 외주사의 싸움에 사그라드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