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귀여워>로 만난 스승과 제자 배우 장선우-감독 김수현

26일 개봉하는 <귀여워>는 여러모로 독특한 영화다. 신인 김수현(36) 감독이 데뷔하면서 스승인 장선우(52) 감독을 배우로 데뷔시켰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꽃잎> <나쁜 영화>의 ‘장선우 감독-김수현 조감독’의 관계가 <귀여워>에서 ‘김수현 감독-주연 장선우’로 바뀐 것이다. 장선우가 맡은 역은 점 봐준다며 여자들 유혹하는 사이비 도사이고, 그 덕에 낳은 배다른 세 아들과 한 집에서 사는 ‘장수로’이다. 냉소적인 것 같으면서 철없는 아이들처럼 말하는 그 모습이 실제 장선우와 닮아 있어 이 영화를 두고 ‘다큐멘타리 장선우’라는 농담도 나돈다.

김/직접 시나리오 쓰게한 건 좋았죠, 쉽고 재미있는 영화 쉽지 않네요

16일 함께 만난 장선우, 김수현에 따르면 <귀여워> 촬영 도중 둘이 사이가 안 좋아진 적이 두세번 있었다. “김수현:장수로가 옥외에서 거친 정사를 하는 신을 놓고 (장선우) 감독님이 왜 그게 필요한지 나를 설득하라고 하셨죠.” “장선우:쑥스럽지. 남은 많이 벗겨봤지만 내가 하려니까. 그런데 역시 (김수현이) 감독이야. 장수로 대사가 말도 안 되는 게 많잖아. 그거 다 해야 하냐고 물으니까 대꾸도 안 해. 그래서 알겠습니다, 알아서 기었지. 그런데 말도 안 되는 대사를 하고 있으니까 재밌더라고.” “김:그거야 말로 감독님한테 제가 배운 거죠.” 장수로와 순이(예지원)의 섹스신도 마찬가지였다. “장:나는 한 번에 됐다고 생각했는데 또 찍자니까 삐졌지. 전문배우가 아니라서 그런지 난 첫 테이크가 좋더라고.” “김:감독님은 연출할 때도 첫 테이크를 좋아했잖아요.” “장:꼭 그런 건 아니고 첫 테이크가 좋은 배우가 있더라고. 나? 난 타고난 아마추어지. 아마추어니까 그런 거지.”

장/벗겨만 봤지 내가 벗으려니깐 영‥‘카오스적 미학’ 하나 건졌잖아

장선우 캐스팅은 김수현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한진희를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썼는데 캐스팅이 안되자 제작자들이 장선우를 추천했다. “김:그러고 보니까 장수로가 감독님과 비슷한 데가 많더라고요. 마음 먹고는 찾아가서 ‘저도 데뷔 좀 합시다’ 졸랐죠.” “장:시나리오는 그 전에 나오자마자 봤지. 좋았어. 그런데 나더러 하라니까. 5년 이상 뒷바라지 했는데 이것도 안 해주냐고 협박하고. 그래서 다시 보니까 말도 안되는 대사 투성이인 거야. 또 나도 폼 좀 잡고 싶은데 완전히 망가지는 거야. 우매한 주변 사람들은 나의 사생활과 일치시키려고도 하고.(웃음)” “김:황학동에서 찍고 세트촬영을 했는데 황학동 촬영 땐 (장선우의 연기가) 불안했는데 세트에 들어와 배우들이 모여찍기 시작하면서 느낌이 살아나더라고요.” “장:나한테도 좋은 점이 많았던 것 같아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끝나고) 한참 동안 영화를 안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시 영화 현장에서 놀 수 있어서 좋았고, 돈도 생기니까 좋았고, 또 다행히도 완성된 영화도 좋으니까. 역시 나는 복이 많은 놈이야.”

김수현이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장선우를 찾아간 건 93년. <너에게 나를 보낸다> 연출부 막내로 들어갔고 그 뒤로 아이디어가 많은 만큼 포기도 빠른 장선우 밑에서 수도 없이 시나리오를 썼다. “김:연출부끼리 열심히 머리 맞대 시나리오 쓰는데 감독님이 ‘재미없다’ 그러면 그걸로 끝이예요. 그날 술 먹고 다른 거 쓰는 거죠. 그런데 연출부에 시나리오를 쓰게 한 건 참 좋은 것 같아요.” “장:<나쁜 영화> 찍을 때 (김수현에게) 촬영 맡겨놓고 놀러갔다니까. 왠만큼 믿으면 그렇게 하겠어?” 김수현이 꼽은 장선우 영화 넘버원은 <꽃잎>이었다. “김: 참 슬픈 영화 같아요. 작년에 텔레비전에서 다시 봤는데 참 잘 만들어진 광주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촬영 때는 뭘 찍는지도 모른 채 금남로 한 구석에서 타어어만 태우고 있었는데.(김수현은 그때 세번째 조감독이었다.)” “장:그랬으니까 영화가 더 슬퍼 보였겠지.”

“김:제가 감독님과 닮아있는 점이요? 부지불식간에 많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감독님은 영화할 때마다 쉽고 재밌는 영화한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쉽지 않잖아요. <귀여워>도 쉽고 재밌게 한다고 했는데, 쉽지도 재밌지도 않고.” “장:카오스적 미학을 쓴 감독이 한국에 없었거든. 내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에서 한다고 하고 망했는데 김 감독은 해냈잖아.”

<귀여워>는 어떤 영화?

신인 감독들의 영화, 그중에서도 극장 개봉작을 대상으로 놓고 볼 때 지난해의 발견이 <지구를 지켜라>였다면 올해의 발견은 <귀여워>이다. 새롭고 전복적이다.

새로운 건 이 영화가 추구하는 혼돈과 축제의 미학이다. 이미 반 이상 철거돼 몰골이 전쟁터처럼 돼버린 서울 황학동 아파트에 콩가루 가족이 산다. 바람둥이 사이비 도사 아버지(장선우)와 그의 배다른 세 아들(김석훈, 정재영, 선우)로 구성된 이 가족은 주거공간이 같을 뿐 각자의 생활과 꿈은 콩가루처럼 따로 논다. 남에게 충고하거나 관여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남자 뿐인 이 집에 여자(예지원)가 들어온다. 그럼 이 여자가 접착제가 돼 가족이 복원될까. 복원 같은 건 이 영화의 안중에 없다. 여자는 이 남자들 저마다의 꿈과 욕망이 황학동으로 모이도록 하는, 축제의 호스트이다. 여자와 남자들 사이에 각각의 사연이 쌓여 기괴한 4각 관계가 형성되기까지 이 축제엔 웃음과 아이러니가 가득하다. 이 혼란스런 축제가 끝나자 가족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흩어진다. 이건 봉합이 아니라 흩어지기 위한 축제다. 안쓰럽고 스산하다. 폭소와 스산함이 한 데 얽히는, 한국영화에서 만나기 힘든 혼란스런 감흥을 연출한다.

<귀여워>는 에밀 쿠스트리차를 연상시킨다. 인종청소가 자행되던 끔찍한 유고분쟁의 와중에서 제 정신인지 실성했는지 모를 인물들이 펼치는 난장의 감흥은 <귀여워>와 닮아 있다. 그러나 쿠스트리차의 영화는 유고분쟁이라는, 누구라도 동의할 처참한 상황을 깔고 있었다. 지금의 한국과는 다르다. 철거깡패의 폭력 위협이 상존하는 철거촌이 배경이지만 그 위협에 구속당하는 이는 아들 중 한 명(정재영)뿐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철거를 의식하지 않고 산다. 상황을 탓하지 않는 이들은 상황에 희망을 걸지도 않는다. 쿠스트리차 영화의 배경을 지금의 한국으로 바꿔내는, 그 앞서간 절망감엔 전복의 기운이 있다. 또 상황보다 개성강한 캐릭터들에 의존해 혼돈의 미학을 끌고가는 연출엔, 전압이 불안정하면서도 전력이 큰 에너지가 있다. 올해 한국 영화는 끝자락에서 새 피를 수혈할 감독을 만났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