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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사랑의 관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이종도 2004-11-02

알츠하이머병조차도 사랑의 기억만큼은 부식시킬 수 없다고 믿는 순애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두눈을 바라보면서 옛 애인 이름을 부르고, 그것도 모자라 사랑한다 말할 때 그걸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오줌을 지리며 하나둘 기억을 잃어가는 스물일곱의 아내를 눈물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불치병의 아내를 잃는 영화 <러브 스토리>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 순애보다.

벼락처럼 떨어진 조발성 불치병을 앞세워 관객에게 눈물을 요구하는 영화인 만큼 처음 장면부터 클로즈업으로 손예진의 눈물을 잡아낸다. <약속>이나 <편지>류의 과잉 멜로의 뒤를 따르면서도 조금 낯선 점은 기억과 사랑의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는 데 있다. “나한테 잘해줄 필요없어. 다 잊어버릴 텐데” 같은 대사들이 오히려 이 영화의 숨은 매력이 될 수 있다. 기억없는 사랑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가, 사랑이란 기억의 공유인가 같은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기억의 쇠퇴는 숙명처럼 들이닥치는 것이니, 당신이나 당신의 배우자가 기억상실에 걸렸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수진(손예진)은 편의점에서 콜라를 샀다가 지갑과 콜라를 두고 나온다. 되짚어간 편의점에서, 콜라를 들고 나오는 철수(정우성)와 부딪히면서 엉뚱한 오해가 가느다란 운명의 끈이 되어 두 사람을 이어준다. 영화는 친절하게도 우연의 일치를 이들에게 한번 더 허락한다. 수진의 아버지는 건설업체 사장이며, 현장소장이자 건축사 지망생 철수는 그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공사장 장면을 비롯해 철수의 삶에 생활의 냄새를 불어넣는다. 자와 망치 등 공구를 가지고 다니며 의자와 조각품을 만들고 심지어는 여자의 고장난 핸드백까지 수리한다. 이재한 감독은 철수의 삶의 터전인 공사장에 노을을 깔고 <라 팔로마>의 선율을 흘리며 철수에게 애정을 표한다. 진흙 묻은 지프와 적당히 때묻은 작업복도 철수의 매력을 더한다. 자신의 직장 내부 공사를 아버지에게 부탁하면서 수진과 철수는 한번 더 우연하게 만난다. 수진은 핸드백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연필(“볼펜을 잘 잃어버려서…”)과 건망증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기껏 차 문을 열었을 뿐인데 핸드백 날치기가 나동그라지는 철수와는 조금 다르다. 수진은 누군가가(그건 관객일 것이다) 보호해야 할 사람인 것이다.

우연의 시간이 지나면 필연적인 사랑의 시간이 찾아온다. 핸드백 날치기를 잡느라 유리창이 다 깨진 채로, 철수는 고글을 쓰고, 수진은 안전모를 쓴 채 밤의 한강변을 달리는 장면은 다시 한번 흐르는 <라 팔로마>와 함께 설렘과 기대 그리고 통증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제 관객인 당신은 조금씩 아파하게 될 것이라며, 영화는 고통의 가속도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야구연습장에서 철수가 수진에게 ‘공을 끝까지 보라’며 배트 휘두르는 방법을 알려주는 장면, 철수가 바르는 이발소 스킨 로션, 철수가 가르쳐주는 ‘야바위’ 카드 뒤섞기, 철수의 방에 45도로 흘러내리는 햇살은 두 사람의 사랑을 무르익게 하는 효모 노릇을 한다. 왜 수진이 아니라 늘 철수만 시혜자냐고 묻지는 말자. 건축가 마리오 보타의 화집을 보거나 수진의 얼굴을 닮은 나무 조각을 파는 철수의 취미가 너무 고급스럽다고 불평하지 말자. 우리의 눈동자는 ‘난 어릴 적부터 어른이었다’고 말하는 철수보다는 순정파이며 울보인 손예진에게로 향해야 한다. ‘공사판 노가다 같은 놈’을 사귀는 것을 불편해하다가 나중에는 흔쾌히 승낙하는 수진의 아버지도, 철수를 낙태시켰어야 했다고 날뛰는 철수 엄마(김부선)도, 수진을 배신함으로써 큰 충격을 준 유부남(백종학)도 이 영화에서는 주변부에 불과하다.

기억의 소멸이 사랑의 소멸이라는 서글픈 진실을 이 영화는 알려준다. 손아귀 틈새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기억은 수진의 몸 바깥으로 달아난다. 수진이 철수와의 행복했던 기억만이라도 움켜쥐려 할 때, 도화지에 온통 철수 그림만 그릴 때, 마지막 남은 기억을 다해 사랑의 말을 전할 때 손예진의 투명한 눈동자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그런데 그 눈동자로 가는 길이 조금 멀다.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을 매일 다시 기워야 하는 수진의 삶이, 수진에게 사랑의 기억을 되살리려 이발소 스킨을 다시 바르는 철수의 눈물이 우리의 마음을 통째로 뒤흔들지는 못한다. 수진의 정신적 죽음 앞에서 우리가 눈물을 제때 떨구기 어려운 까닭은, 우리가 수진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노을과 햇살 그리고 스타일이 자리를 차지했다. 오페라 아리아 <공주는 잠 못 들고>가 흐르는 가운데 가스레인지 불을 줄이러 가는 철수를 슬로모션으로 잡는 장면이나, 오광록 같은 배우가 담뱃불을 빌리러 의미없이 나왔다가 사라지는 장면 등이 그렇다. ‘용서는 마음의 방 한칸만 있으면 된다’는 등의 겉도는 대사도 그래서 울림이 적다. 일본 <요미우리 방송>이 2001년에 제작한 드라마 <순수한 영혼>이 원작. 소설가 김영하가 각색을 맡았다.

:: 영화 속 알츠하이머병

정신적 죽음을 불러오는 지우개

수진이 마련한 이층짜리 도시락은 철수의 공사판 점심상에서 단연 빛난다. 동료들은 철수가 도시락 뚜껑을 열 때 질투와 선망으로 바라본다. 첫 번째 도시락을 열자 윤기가 흐르는 쌀밥이 나온다. 다음 도시락은? 역시 쌀밥이다. 알츠하이머병은 조용한 포식자다. 볼펜, 지갑, 가스불 잠그기…. 수진의 뇌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이 포식자는 식욕을 조금씩 불려나간다. 친구들에게 “집을 잘 못 찾아가겠어, 이상해”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오늘이 며칠인지, 생일은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아도 “내가 원래 수학에 약하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증상은 악화일로, 나중엔 결혼한 사실까지 잊는다.

수진은 알츠하이머병의 권위자 이 박사(권병길)를 찾아간다. 알츠하이머병으로 아내를 잃은 뒤로 50년 동안 알츠하이머병만 연구한 사람이다. 이 박사가 설명하는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은 이상 단백질이 혈관에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수진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까닭은 유전적 요인이 큰데 이는 매우 드문 경우다. 알츠하이머병 환자는 매년 5%씩 뇌세포가 소멸하며 기억기능과 관련된 뇌부위는 매년 10%씩 세포가 죽는다. “정신적 죽음이 육체적 죽음보다 먼저 온다”는 이 박사 말대로다. 이 박사는 수진에게 직장을 빨리 그만둘 것을 충고한다. 정신적 죽음 다음에는 사회적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병은 기억력 상실로 출발해 인지장애와 성격변화, 육체 쇠약, 환청과 환각 증상으로 자신의 영토를 넓혀나간다. 짧게는 영화 <아이리스>에서 아이리스 머독처럼 3년, 길게는 20년이 걸릴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마침내는 사람을 쓰러뜨리고 만다는 것이다. 더 무서운 건 이 병이 도대체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아직 밝힐 수 없다는 데 있다. 다른 질병보다 유전 요인을 가리기가 힘들고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이 되는 유전자가 어떻게 발현하는지 무엇이 그 유전자의 작동을 결정하는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864년에 태어난 독일의 신경병리학자 알로이스 알츠하이머의 이름을 딴 이 병은 미국의 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을 쓰러뜨렸고, 전세계 노인의 10명 중 한명을 괴롭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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