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7일부터 열리는 제5회 서울유럽영화제, 10개국 총 29편의 영화 상영
2004년 한해 동안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던 유럽 거장들의 신작들, 유럽 각국의 박스오피스를 달구었던 대중영화들, 현재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들의 흥미로운 작품들. 이 모든 것을 한곳에 아우르는 먹음직스러운 뷔페 ‘제5회 서울유럽영화제’가 오는 10월27일(수)부터 31일(일)까지 삼성동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개최된다. 10개국에서 초청된 모두 29편의 영화들로 풍족하게 구성된 영화제는 각각 ‘내셔널 초이스’, ‘유러피안 뉴웨이브’, ‘핫 브레이커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특별상영-유럽의 향취’까지 5개의 섹션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 섹션은 내실있는 작품들을 다양하게 아우르고 있다. 이미 40%의 인터넷 예매분 중 화제작들은 거의 매진된 상황이지만, 60%에 달하는 현장 예매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매상황이나 각 프로그램들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www.meff.co.kr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아래는 각 섹션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아직까지 국내에는 그 면모가 잘 알려지지 않은 추천작들이다.
내셔널 초이스에서는 최근 1, 2년간 세계 3대 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던 거장들의 신작을 만나볼 수 있다. 칸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아네스 자우이의 <룩 앳 미>, 베를린영화제 대상을 수상했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았던 <미치고 싶을 때>를 비롯, 빔 벤더스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등 언제나 새로운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거장들의 신작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베니스영화제 경쟁작이었던 미라 네어 감독,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베니티 페어>는 이번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룩 앳 미> 프랑스 l 2004년 l 110분인생의 가능성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한없이 비관적인 스무살의 뚱뚱한 여자 롤리타와 그녀의 자아도취적이고 독단적인 작가 아버지 에티엔, 그들을 둘러싼 파리 중산층 예술가 집단의 선병질적인 관계맺음에 대한 코미디영화. 감독인 아네스 자우이는 데뷔작인 <타인의 취향>과 마찬가지로, 독설로 가득한 냉소적인 세계 속에 깃든 삶의 유쾌함을 사려깊은 화법으로 그려낸다. 특별한 내러티브 없이 인물간의 감정을 세밀한 태피스트리를 직조하듯 촘촘하게 짜낸 이 작품으로 아네스 자우이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로맨틱코미디라기보다는 로맨틱한 순간들을 자기도 모르게 담아내는 유려한 실내극의 향취를 지닌 영화.유러피안 뉴웨이브에서는 지금 현재 유럽영화계에서 주목하는 새로운 감독들의 신작 11편이 다양하게 선정되었다. 새롭게 등장한 신성들의 작품들을 통해 차기 유럽 영화계를 이끌고 나갈 새로운 경향을 짐작할 수 있는 섹션이다. 영화제의 모든 섹션을 통틀어 가장 독창적이고, 실험적이고, 도발적인 작품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부문이기도 하다.
<내 어머니>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 l 2004년 l 110분17살의 피에르는 어머니에게 플라토닉한 감정 이상의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 그 사랑 앞에 머뭇거리던 어머니는 도덕적인 굴레를 벗어던지고 쾌락의 노예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 속으로 아들을 데려가고, 도박처럼 위험한 성적 환희의 세계 속에서 피에르는 치명적인 환락을 맛본다. 크리스토프 오노레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내 어머니>는 위험할 정도로 도발적인 영화다. 사도-마조히즘과 계속되는 성기노출에 면역이 된 관객일지라도 어머니와 함께 자위행위를 벌이는 장면 등 근친상간의 테마가 화면에 실제로 구현되는 순간에는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것이다.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 모든 욕망을 관장하는 ‘이자벨 위페르’의 순결하도록 악마적인 카리스마가 강렬하다. <101 레이캬비크> 아이슬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프랑스 l 2000년 l 88분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 살고 있는 서른살의 백수 힐누르는 복지국가의 혜택을 가득 누리며 하루하루 무료한 일상을 소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엄마는 스페인에서 온 플라멩코 선생과 사랑에 빠졌음을 선언하며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을 커밍아웃하는데…. 문제는 플라멩코 선생이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바로 힐누르라는 사실이다. 2000년 로카르노영화제 청소년심사위원상 수상작인 <101 레이캬비크>는 젊고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가득한 유쾌한 코미디영화다. 플라멩코 선생으로 출연하는 알모도바르의 뮤즈 빅토리아 아브릴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는 것도 반갑다. <호텔> 독일, 오스트리아 l 2004년 l 82분오스트리아 알프스의 한 낡은 호텔에 취직한 이렌느는 자신의 전임자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뭔가 비밀을 품고 있는 직원들은 실종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적대적으로 이렌느를 대한다. 지친 그녀는 호텔을 벗어나려고 애를 써보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냄새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샤이닝>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데이비드 린치의 세계라고 표현한다면 적절할 영화. 푸른색과 하얀색, 붉은 색조만으로 단단하게 짜여진 색채 속의 미장센은 언제나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둠을 지니고 있으며, 주인공들은 호텔 속을 헤매다가 그 어둠 속으로 종종 ‘사라져버린다’. 불가해한 미로 속을 거니는 바스러질 듯한 두려움을 경험할 수 있는 작품이다.핫 브레이커스에서는 유럽 각국의 박스오피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대중영화들을 만나볼 수 있다. 자국에서 15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스페인영화 <섹스 앤 루시아>, 체코의 흥행작 <푸펜도>, 프랑스의 <말라바 프린세스>는 각국의 대중적 감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특히 장만옥에게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린>은 현대 프랑스 대중영화와 오랜 프랑스 작가주의 전통의 멋진 화음을 선사해줄 작품이다.
<클린> 프랑스, 캐나다 l 2003년 l 110분록뮤지션 리가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하자, 그의 아내 에밀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마약소지죄로 선고받은 6개월의 감옥생활을 끝내고 나온 그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은 시부모가 양육하고 있는 아들. 하지만 마약과 반짝이는 명성에 대한 유혹은 그를 여전히 괴롭히고, 아들과 시부모의 차가운 눈빛을 극복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마베프> <데몬러버> 등 실험적인 영화학도의 정신을 잃지 않았던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전작들과 비교해 <클린>은 가장 전통적인 드라마투르기로 만들어진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 록음악 등 대중문화와 영상매체의 점층적인 교접을 시도하는 아사아스의 세계는 <클린>에서도 풍요롭게 드러난다. 신파에 가까운 내러티브를 전혀 신파로 보이지 않게 만드는 장만옥의 연기는 대단한 정서적 울림을 공명해낸다.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호러, 스릴러, 섹스코미디 등 심야상영에 걸맞은 네편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섹션. 특히 이탈리아 마카로니 호러영화의 거장인 다리오 아르젠토(<서스페리아> <페노미나>)의 신작과, 브라이언 유즈나의 새로운 ‘좀비오 시리즈’ <비욘드 리애니메이터>는 호러영화광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 만한 프로그램이다. 밤을 잠시 잊어보도록 하자.
<카드 플레이어> 이탈리아 l 2004년 l 96분경찰과 인터넷 포커게임을 벌여 납치한 인질의 생명을 거래하는 연쇄살인범 ‘카드 플레이어’와 그의 행방을 추적하는 여형사 안나의 대결을 그리는 스릴러영화. 이탈리아 호러영화의 거장인 다리오 아르젠토의 신작임에도 불구하고 <카드 플레이어>는 오히려 전통적인 주류 할리우드식 스릴러영화의 플롯에 가까운 작품이다. 아르젠토의 초기작들에서 볼 수 있었던 장중한 살인의 미학 대신 <카드 플레이어>를 채우는 것은, 카드게임으로 인질의 생명을 거래하는 장면의 긴박함이다. 물론 (날카로운 물건을 이용하는) 몇몇 장면에서는 아르젠토 특유의 독창적인 ‘살인 미학’을 맛볼 수 있다.이외에도 ‘유럽의 향취’라는 부제를 달고 공개되는 특별상영작 2편이 기다리고 있다. 영국 노동계급 훌리건들의 폭력적인 문화에 대한 보고서인 <풋볼 팩토리>는 <트레인스포팅>의 ‘축구판’이라고 할 만한 작품. 테크노 음악 속에서 훌리건들의 생태 속을 헤집고 들어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유쾌하기 그지없다. 와인에 대한 다큐멘터리 <몬도비노>는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선정되었던 작품으로 일견의 가치가 있다.
<몬도비노> 프랑스, 아르헨티나, 스페인, 미국 l 2004년 l 135분올해 칸영화제에서 개막 10분 전에 경쟁부문에 새롭게 추가되면서 화제를 모았던 작품. 세 대륙을 횡단하며 열심히 카메라에 담은 와인의 역사를 따라가다보면, 미국의 다국적 와인회사와 유럽의 전통적 와인산업 사이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슬그머니 드러난다. <몬도비노>는 기호품에 대한 단순한 인류학적 탐구만은 아니다. 오히려 이 다큐멘터리는 세계화로 표방되는 자본의 권력 앞에서 무너져가는 ‘와인 정신’의 투쟁과 몰락을 슬프게 지켜볼 수 있는 작품이다. 2시간에 달하는 다큐멘터리이지만 극적인 순간들과 절묘한 유머감각을 지니고 있어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다.김도훈 groove@cine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