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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아르가 되기엔 너무 착한 영화, <우리형>

노스탤지어영화에 대한 노스탤지어 <우리형>

<우리형>은 참 묘한 영화다. 영화에는, 주인공 두 형제의 성격만큼이나 대조되는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고 있다. 애틋한 가족드라마와 누아르풍으로 과장된 비극적 정조와의 이상한 동거. 영화는 ‘상처’를 지닌 한 가족의 일상에 밀착하려는 진심어린 태도와, 거리낌없는 영화적 상투구에의 안이한 의존 사이에서 방황한다. 가족 안의 일상을 ‘리얼’하게 관찰하던 카메라는, 그 가족의 경계를 벗어나면 수많은 영화적 장면들을 복사해 옮기는 재생기가 된다. 고등학생이 된 두 형제의 삼각관계는 버스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마지막 그 비극의 날에는 비가 와야만 한다.

누아르적 비극정서 ‘빌린’ 가족 드라마

그간의 노스탤지어영화들에 대한 일종의 노스탤지어처럼 보이는 그 영화적 인용들은, <가족>에 이어 또 한편의 ‘가족누아르’가 되고자 하는 <우리형>으로서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형>은 누아르가 되기에는 너무나 ‘착한 영화’다. 무엇보다, 악역인 깡패 조영춘(정호빈)에게 캐릭터로서의 깊이감이 전혀 없다는 것이 그것을 방증한다. 그리고 이것은 원조 ‘한국형 가족누아르’라고 할 수 있는 <초록물고기>와 <우리형>이 가장 비교되는 대목이다. <초록물고기>의 텍스트적 두터움은 악역 배태곤(문성근)이 지닌 캐릭터로서의 깊이로 인해 비로소 가능했다. <가족>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형>에서의 누아르적 분위기는, 과잉 증폭된 비극적 정서로 낡은 가족 이데올로기를 윤색하기 위한 수단 또는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태극기 휘날리며>가 한국전쟁을 무대로 수행했던 그것을, <가족>과 <우리형>은 악당이 되기에는 목소리만 너무 큰 ‘동네 깡패들’의 도움을 얻어 반복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이 두 영화가 온전한 ‘가족누아르’가 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이다.

<우리형>은 부산이라는 공간과 사투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지역영화’이기도 하다. 굳이 <친구>의 조감독이라는 감독(안권태)의 이력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영화가 곽경택 감독의 영화들(<친구> <똥개>)과 일종의 형제관계에 있음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영화 스스로가 그 상호텍스트성 또는 친족성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비오는 날의 액션신과 <친구>, 등나무신과 <똥개>의 포스터 이미지). 하지만 그 지역성은 가족멜로드라마 효과를 위한 무대장치 이상의 것이 아니다. ‘지역영화’로서의 <우리형>은 곽경택의 <똥개>가 이룬 성취에서 오히려 한 걸음 후퇴하고 있다. 지역 정서와 결합된 누아르적 비극의 정서, 그리고 그것이 산출하는 강력한 노스탤지어의 효과. 그 모든 것이 가족드라마 <우리형>에서는 일종의 알리바이 또는 무대장치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형>의 가족드라마와 누아르풍 비극적 서사의 공존은 단순한 공생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자가 후자에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낡은 술은 낡은 부대에 담으라?

영화 <가족>에 대해 황진미가 내렸던 진단(“<가족>은 가족의 화해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상한 방식으로밖에 화해할 수 없는 부녀를 통해 역설적으로 가족 화해의 불가능성과 난망함을 보여주는 영화이다”-<씨네21> 466호)은 정확히 <우리형>에도 적용된다. 두 영화가 공유하고 있는 몇 가지 이미지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두 영화에는 하나의 징후처럼 지나치게 낡은 ‘가족 사진’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등장한다. 어쩌면 두 영화가 가족 밖의 누아르적 비극성에 과도하게 기대지 않을 수 없었던 진짜 이유는, 바로 가족 안에 존재하는 그 낡은 징후들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영화에 등장하는 가족 사진들에는 납득하기 힘든 ‘낡은 흑백 사진들’이 등장한다. 그 시절(멀리 잡아도 70년대로 추정되는 시점)에 흑백 사진이 흔했을까 하는 ‘사실’에 대한 시비가 아니다. 문제는 그 낡은 사진을 통해 얻고자 하는 ‘효과’이다. 그 시각적 효과들은 낡은 가족주의 서사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가 된다. 또한 두 영화는 이상하리만치 그 시간적 배경을 짐작하기 힘들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는 철저하게 ‘과거’의 분위기가 풍기는 공간들을 프레임으로 잡는다. ‘현재이면서도 현재가 아닌(이성욱)’ 시간 속에서만 전개될 수 있는 가족 이야기.

가부장 복원에 대한 열망, 오이디푸스적 숙명에의 예언

<우리형>에서 형 성현(신하균)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난 그 ‘상처’는, 아버지의 부재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그 ‘상처’ 때문에 아버지는 죽지만, 그 상처는 끝내 치유되지 않은 채 남고, 그리하여 이미 죽은 아버지는 일종의 ‘부재하는 원인’으로서 현재의 가족이 펼치는 비극의 서사를 주재한다. 아버지의 부재, 불완전한 가족 삼각형.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온전한 가족 삼각형을 복원하려는 눈물겨운 노력과 그것의 운명적인 실패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성현에 대한 엄마의 과잉보상으로서의 편애는, 단순한 모성적 본능의 발현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가족을 저버리고 죽어버린 남편에 대한 악에 받친 복수이며, 그 ‘결손가정’을 향한 삐딱한 사회적 시선에 맞선 처절한 대응이다. 전근대성(두 형제의 싸움을 아비없는 ‘후레자식’ 탓으로 이해하려드는 선생)과 근대성(성현과 두식 때문에 동네 집값이 떨어진다는 농담 또는 진담)이 중첩되어 작용하는 강력한 사회적 시선의 압력.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성현의 상처를 원상복구시키려고 하는 엄마의 욕망은 또한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한 성현을 당당히 그 아버지(가부장)의 자리에 앉히고자 하는 열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엄마는 입으로는 ‘형제애’를 강조하지만, 정작 그 형제 사이에서 어떻게든 아버지-아들의 위계를 만들어내고자 애를 쓴다. 성현의 반찬과 옷을 먼저 챙기려드는 엄마의 모습은 ‘가부장’에 대한 그것이며, 그래서 ‘형 성현은 아들 같고 동생 종현은 남편 같다’는 엄마의 말은 하나의 역설이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족간의 소통과 화해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끔찍한 오이디푸스적 숙명의 비극성(끝내 ‘살부행위’로 종결되어야 하는)의 징후를 품고 있다. 엄마의 온전한 가족 복원에의 열망(형 성현의 가부장 만들기)은, 두 형제 사이에서 부재하는 아버지의 자리를 놓고 겨루는 일종의 ‘인정투쟁’(認定鬪爭)을 유발한다. 오로지 형 성현(신하균)에게 향해 있는 엄마의 시선, 그런 엄마를 원망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동생 종현(원빈)의 시선. 이런 서로 어긋하는 시선의 운동은, 어느 날 두 형제가 마주치게 된 한 소녀를 사이에 두고 역전된 형태로 반복된다. 두 형제가 미령(이보영)을 사이에 두고 마주선 순간, 종현의 시선은 미령을 향한 형의 시선을 느낀 뒤에 한층 더 불꽃이 이는 것처럼 보인다. 종현의 미령에 대한 욕망은 성현의 그녀에 대한 욕망을 매개로 점화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령을 둘러싼 두 형제의 갈등은 엄마를 둘러싼 갈등에 대한 일종의 대리전이며, 동생 종현의 복수극이기도 하다. 그는 성현의 무기(바바리코트와 시)를 이용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 대리전의 승자가 된다. 형의 바바리코트를 뺏어 입으며 내뱉는 동생의 그 가혹한 말(“니하고 내하고 차이점이 뭔지 아나? 진짜도 네가 입으면 가짜 같고, 가짜도 내가 입으면 진짜 같다 아이가”)은 엄마를 향한 원망의 말(“누군 입이고, 내는 주둥이가!”)의 정확한 대구이다. 그러나 동생 종현은 오로지 그 대리전에서만 승자일 뿐 현실에서의 승자는 형 성현이 된다.

<우리형>의 진짜 비극성은 성현이 승자가 된 그 순간, 즉 의대에 진학함으로써 보호의 대상에서 집안의 기둥이 된 그 순간(엄마의 유사 아버지 만들기 노력이 비로소 성공한 그 순간), 바로 좌절된다는 데에 있다. 동생 종현의 원망과 반항이 격렬해지는 것은, 그래서 형 성현의 죽음의 원인이 될 비행을 저지르는 것은, 정확히 자신이 그 인정투쟁에서의 패자임을 자각하는 순간과 일치한다. 나름대로의 마지막 노력(잃어버린 엄마의 돈을 되찾고 보충해주고자 하는 노력)은 인정받지 못하고, 이제 승자가 된 형 성현은 ‘감히’ 자신을 타이르려고 든다. 종현의 원망(願望)은 ‘운명의 장난’을 통해 성취되지만, 그것은 비극적이고 오이디푸스적인 일종의 ‘살부행위’이기도 하다(종현이 성현으로부터 뺏어 입은 바바리코트와 복수극을 불러일으킨 종현의 비행이 성현의 죽음의 원인이 된다). 끝내 온전한 가족 삼각형의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족애’의 가면 쓴 가부장적 가족주의

물론 문제는 ‘가족’이나 ‘가족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낡은 ‘가족주의’에 있다. ‘결함’있는 자식을 (아마도 ‘가문’에 대한 체면 때문에)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부장적 아버지. 편모가 이끄는 가족을 ‘결손가정’이라 부르고, 그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후레자식’으로 바라보는 가부장적 가족주의. 그러한 시선의 압력을 오로지 온전한 ‘가부장’의 복원으로 이겨내겠다는 원한의 욕망. 그러나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건다는 희생적 모성의 신화는, 엄마의 재혼을 ‘노망’으로 인식하는 자식을 낳을 뿐이다. 문제는 이 모든 낡은, 그래서 비극을 낳을 수밖에 없는 이 무거운 가족주의가, 감동적인 ‘가족애’의 서사로 탈바꿈하려 든다는 것이다. 성현의 치유되지 않는 그 ‘상처’는 분명 낡은 가족주의의 균열의 징후일 것이되, 영화는 그것을 지역 정서와 결합된 노스탤지어 그리고 과장된 누아르적 비극적 정조에 기대어 봉합하려고 애를 쓴다. 돌이켜보면, <초록물고기>와 <우리형>(그리고 <가족>)의 서사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닮아 있지만(결손가정, 장애인 큰형, 누아르적 비극의 결말 등), 그 감동이 가져다주는 여운의 폭과 깊이는 너무나 다르다. 섣부른 대답과 냉정한 질문 사이의 차이. 현실은 미래의 새로운 가족 윤리를 절실히 요구하는데, 영화는 자꾸 과거로 되돌아가자고 한다. 그리고 익숙한 영화적 코드의 결합의 산물 또는 효과로서의 감동(‘기성품’으로서의 감동)을 소비하자고만 한다. 진정 새로운 영화, 그래서 진짜 감동적인 영화는, 새로운 사유와 윤리를 요구한다. 새로운 사유란 언제나 대답보다는 질문을 더 많이 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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