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형>은 일견 형제간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영화로 보인다. 특히 아버지 없는 가족에서 형과 아우가 아버지의 자리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양상은 <태극기 휘날리며>나 <슈퍼스타 감사용> 등에도 묘사됐던 것으로 낯이 익다. 그러나 <우리형>이 다른 형제애를 그린 영화들에 비해 각별해지는 지점은 단연 ‘언청이’ 설정이며, 이를 통해 둘의 갈등은 구체화되고 풍부해진다. 따라서 <우리형>은 단순한 가족영화가 아니라, ‘장애인’을 다룬 영화로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물론 <오아시스>처럼 ‘장애인’을 자세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조악한 화해의 내러티브는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비롯한 모든 ‘껄끄러운 이웃들’을 어떤 방식으로 다루어(죽여)왔는지를 처참하게 보여준다.
‘장애인’ 복지에 대한 양가감정
<우리형>에서 신하균은 선천성 기형아였다. 아버지는 그를 갖다버렸다. 어머니는 도로 주워왔다. 그뒤 아버지는 곧 앓다 죽었다. 어머니는 억척으로 돈을 모아 신하균을 수술시키고 언제나 그를 과잉보호했다. 동생은 형을 창피하게 여기고 무시하며, 무엇보다도 엄마의 각별한 사랑과 불균등한 가계지출에 불만스러워했다. 이 구도는 ‘장애인’에 대한 허다한 대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를 사회나 국가차원으로 확대해도 의미가 보존된다.
과거 자유시장경제 국가에서 ‘장애인’은 그냥 버려졌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표방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거두어진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복지는 헌법만으로 거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구성원들의 동의를 통한 재정분담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선 ‘장애인’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정서와 문화가 뿌리내려야 한다. ‘장애인’뿐이 아니라 (여성, 노인, 아동은 물론, 만성질환자, 정신지체아, 알코올 중독자, 동성애자, 가출 청소년, 실직자, 도시빈민, 성매매 피해자, 범죄자, 전과자, 노숙자, 혼혈아, 외국인노동자, 사회부적응자 등) 모든 ‘소수자’들에 대한 복지와 배려는 재정을 요하며, 요컨대 모든 ‘소수자’들은 ‘돈 먹는 하마’이다. 그런데 ‘소수자’들을 위한 재정지출은 ‘다수’의 동의를 얻기가 쉽지 않다. ‘소수자’는 ‘다수’가 보기에, 짜증나는 존재들이다. 그 존재 자체가 기분 나쁘고, 그들에게 돈 들어가는 것을 참을 수 없고, 그들이 점차 의기소침해지거나 반대로 괴팍해지는 것도 언짢은 노릇이다. ‘다수’는 가능한 한 ‘소수자’의 존재를 잊고 싶어하며, 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양해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원칙’을 넘어서(야 하)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대중을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선을 위하여 대중을 선도하고 설득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형>의 가족은 엄마의 독재(?)에 의해 과도할 정도의 ‘장애인’ 복지가 이루어졌지만, 사회구성원을 적절히 설득하지는 못한 상태를 보여준다. 원빈이 신하균을 한편으로 연민하면서도 한편으로 미워하는 것은, 당위만으로 설득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드러낸다. 이처럼 공동체 속에서 함께하지만, 여전히 껄끄러운 우리의 이웃들을 <우리형>은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형>이 ‘장애인’을 둘러싼 사회적 대응을 단순히 묘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에 대한 가장 극악한 대응방식을 내러티브를 통해 몸소 실천한다는 데 있다.
‘12살에 웬수, 20살에 모든 것’이라고? ‘살아서 웬수, 죽어서 모든 것’이겠지!
우리 사회가 돈 들어가는 복지가 아니라, 돈 안 드는 맨입으로 ‘소수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있다. 이런 이야기의 유형은 첫째, 장애 극복기, 둘째, 천사 만들기, 셋째, 시체 껴안기이다.
첫째, 혼자서 피나는 노력을 통해 장애를 극복한 사례를 발굴하여 미담처럼 주워섬긴다. 커다란 장애를 극복하고 정상인처럼, 아니 정상인도 하지 못할 특별한 업적을 남긴 장애-위인전은 장애인들에게 꿈을 키워준다는 명목을 갖고 있지만, 작동 방식은 다분히 폭력적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장애도 극복했는데…’라는 말은 웬만한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박약 탓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즉 장애를 사회-복지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지의 문제로 축소·은폐시킨다.
둘째, 장애인들은 모두 한결같이 착해야 한다. 사심을 품어서도 안 되며, 자신을 위한 욕망은 일찌감치 알아서 포기해야 한다. 다들 체념의 도를 깨친 지 오래여서 상대가 조롱해도 웃어넘길 줄 안다. 그들은 대체로 정상인들의 사소한 갈등을 화해시키거나 정상인들에게 겸손함이나 자족감 등 ‘착한 마음’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최근 영화들에서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들의 연애문제를 중재하거나 위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셋째, 살아생전에 그들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아예 혐오하다가, 죽고 나면 무고하고 순결하고 가엾은 영혼이라 칭송하며 애도하는 것이다(기지촌 여성, 성매매 피해자, 정신질환자, 노숙자 등). 그들은 죽음을 통해서만 세상에 알려지고, 세상에 포섭된다. 그들의 삶은 죽음으로 환원되고 정화된다.
<우리형>은 위의 세 가지 방식의 종합선물세트라 할 수 있다.
<우리형>의 신하균은 입술의 흉터와 약한 몸과 말더듬과 따돌림을 극복하고, 대망의 ‘서울의대’에 진학한다. 대단한 장애 극복기이다. 신하균은 형이면서도 완전히 맞먹고 덤비는 동생에게 언제나 관대하다. 물건에 대해서건 연애감정에 대해서건 제것에 대한 권리주장을 하지 않는다. ‘주제를 알라!’, ‘그렇게 태어난 거 화나지 않나?’ 해도 달관한 듯 대답한다. 급기야 그는 동생의 죄과로 인해, 동생으로 오인받아 죽음으로써, 무고하고 숭고한 영혼이 된다. 원빈은 신하균을 살아생전에 형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죽은 이후에 받아들인다. 살아 있는 장애인 형은 계속 산 채로 그 불편함과 불쾌함을 감내해야 하지만, 죽은 형은 마음대로 미화하여 추모하면 그뿐이므로 가뿐하다.
<오아시스>에서 모진 말을 하는 ‘종두의 형수’나 낡은 아파트에 혼자 살게 한 ‘공주의 오빠’를 결코 비난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 역시 모질고 질기고 징한 괴로움을 악덕과 더불어 끝끝내 견디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형>에서 보여지는 ‘죽여놓고 애도하는’ 방식은 이기적이고 유치하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신하균처럼 멋지게 극복하고 서울의대를 가거나 착하기만 하거나 무고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별 진전없는 장애의 삶을 각자의 성깔을 가지고 오늘도 지루하게 살아간다. 존재를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삶의 무게를 버텨내는 대신, 죽여 숭고한 영혼으로 만든 다음 애틋한 미소를 날려주겠다는 것은 얼마나 안이하고 무책임한 태도인가? 산 사람이 아닌 죽은 시체와 화해하고 사랑하겠다는 우리의 시체애호증 덕분에 ‘죽어야 사는’ 우리의 껄끄러운 이웃들은 오늘도 ‘내가 빨리 죽어야 내 존재를 알 테지…’ 하며 ‘수동-공격’(passive-aggressive)의 원한을 키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