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태석(재희)은 값비싼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집집마다 광고전단지를 붙여놓고는 오랜 기간 전단지가 그대로 남아 있는 집을 골라 몰래 들어가 며칠씩 머무르곤 한다. 영화의 첫 몇 장면을 본 관객은 그를 아르바이트생이나 좀도둑쯤으로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런 예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그릇된 것임이 밝혀진다. 그는 그저 주인들이 잠시 떠난 빈집에서 혼자 기거하며 밥을 지어먹고 잠을 청하고 빨래를 하거나 집을 청소한다. 그리곤 또 다른 빈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뿐이다. 어느 날 그는 한 집에서 폭력적인 남편에게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는 선화(이승연)- <나쁜 남자>의 여주인공과 동일한 이름 - 를 만난다. 이후 둘은 함께 이곳저곳의 빈집을 전전하며 비록 잠깐이지만 그들 나름의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빈 집>은 여전히 김기덕이 미완의 작가라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나쁜 남자> 이후 가장 흥미로운 영화로 여겨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는 지금껏 자신이 창조해왔던 많은 인물들이 그들 자신의 삶을 살았다기보다는 죽음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임을, 즉 유령과도 같은 (비)존재들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보이고 있기 때문이다(<빈 집> 이외의 작품 가운데 이의 가장 명료한 예는 아마 <실제상황>이나 <해안선> 등일 것이다). 감옥 안에서 태석이 행하는 ‘유령연습’, 영화 속에서 거듭 복선으로 등장하다 두 주인공이 합일을 통해 무게 ‘0’의 유령적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주기에 이르는 저울 같은 소도구의 활용은 약간은 우스워 보이고, 지나치게 의도를 투명하게 드러낸다는 단점은 있지만 여기에 김기덕의 진정이 담겨 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 것 같다. 사실 <빈 집>에서 좀더 매력적인 점은 김기덕이 <나쁜 남자>에 이어 다시 한번 환상의 구조를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는 데 있다. 다만 여기서 환상의 주체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는데, <빈 집>의 서사적 진행과정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이 영화와 가장 닮아 있는 것은 김기덕 자신의 영화가 아니라 이창동의 <오아시스>라는 걸 깨닫게 된다.
여기서 김기덕은 더이상 스크린에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의 형상을 그려내는 작업엔 관심이 없다. 거듭 말하지만 그는 장소, 그러니까 짐승들의 ‘서식지’ 혹은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미학적으로 무대화하는 작업으로부터 여러 장소들이 만들어내는 사이 내지는 간격의 존재를 드러내는 작업으로 이행한 것이다. 영화 속에서 우리는 태석이라는 인물을 상징적으로 의미화하는 장소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김기덕은 스스로 장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남으로써 필연적으로 장소와 결부되게 마련인 현존을 의문에 봉착하게 만든다, 라고 말하는 건 지나친 것일까? 어쩌면 아직은 그렇게 말하기엔 <빈 집>은 빈틈이 적지 않은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전작 <사마리아>는 김기덕이 대사의 운용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으며 상투적이기까지 하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빈 집>에서 두 남녀 주인공의 대사를 거의 없애버린 것이 그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많은 대사가 할당된 선화의 남편이 내뱉는 (전형적인 텔레비전 연속극풍의)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사실 ‘한국인으로선’ 웃음을 참기 힘들다. 하지만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이런 식의 집착을 떨쳐내고 <빈 집>을 들여다보면 분명 이 작품이 최근의 김기덕이 내놓은 가장 사려 깊고 성숙한 작품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 김기덕 감독의 변화공간의 비정상성, 정상성의 교란으로
당연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빈 집>은 김기덕의 이전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며 그런 만큼 일종의 ‘숨은그림찾기’의 유혹으로 보는 이를 끌어당긴다. 하지만 우리가 좀더 주목해야 할 것은 김기덕이 공간과 사물과 인물들을 다루는 데서 보여지는 미세한 변화들이다. 물론 사물들을 그 본래의 기능(이라고 여겨지는 것)으로부터 이탈시켜 의외의 용도로 활용함으로써 관객에게 충격- 때로는 웃음- 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여전하다. (골프채) 3번 아이언이 흉기로 활용될 지경이니까. 그러나 제법 공들여 꾸며진 비정상적인 거처들을 인물들의 심리를 반영하는 상징적 공간으로 규정하곤 했던 영화들- <악어>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까지- 과는 달리 (<사마리아>와) <빈 집>에는 그런 식의 공간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뚜렷이 정주할 거처를 지니지 않은 주인공들이 오가는 공간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공간들, 즉 이런저런 계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각양각색의 집들이다. 또한 인물들이 그 공간에서 취하는 행동들 역시 지극히 범속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빈 집>에서 특히 태석이 감방에 수감되고 선화가 집으로 돌려보내지기 전까지의 부분에서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색다른 공간도, 인물들의 기이한 행위도 아니며 오직 공간과 공간 사이를 옮겨다니는 인물들의 이동 자체이다. 이같은 이동을 우리는 정상성의 ‘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그럼으로써 그 정상성을 교란시키는 일종의 ‘간격 만들기’(spacing)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동해야 할 것들을 멈춰 서 있게 하고- 배(<야생동물 보호구역>), 오토바이(<섬>), 버스(<수취인불명>)- 정지해 있어야 할 것들을 움직임으로써- 모터를 단 좌대(<섬>), 호수 가운데의 사찰(<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혹은 응당 고정된 장소에서 벌어져야 할 일을 이동하면서 벌어지게 함으로써- <나쁜 남자>에서의 트럭을 통한 ‘이동 매춘업’- 낯선 감각을 창출해냈던 김기덕은 <사마리아> 이후로 이제 그런 식의 단순한 아이디어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김기덕의 ‘성숙’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