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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만에 드라마 출연한 최수지

떠날땐 서희였지만 윤희로 돌아왔어요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영화도 있지만, 1980년대 후반 청춘의 한 시기를 거친 이들에게 ‘최수지’라는 이름은 그가 세상물정 모르고 파견돼온 스파이인지, 조금이나마 이땅에서 대중문화의 세례를 맛보고 자란 토착 시민인지를 가르는 한 시금석으로 삼을 만하다. 최수지라는 이름이 갖는 광휘는 그만큼 찬란한 바가 있다. 그는 87년 <사랑이 꽃피는 나무>로 데뷔한 이래 각종 드라마와 영화 주연으로 인기를 누렸으며, 특히 88년 대하드라마 <토지>의 서희 역을 통해선 당대의 히로인으로 우뚝한 자리를 차지했다.

공채 2주만에 주연, 10여년 늘 봄날이었지만 <토지>의 그늘 아래였다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8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그가 기억되는 데는 데뷔와 동시에 순식간에 대중들의 눈길을 붙잡은 그의 빼어난 미모가 자리잡고 있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86년 롯데제과의 ‘찰떡아이스’라는 신제품이 인기 상품 반열에 오른다. 최수지가 달나라 항아로 분해 출연한 광고가 전파를 타면서다. 하늘하늘한 선녀옷을 입은 채 절구공이를 찧던 그의 모습은 묘한 성적 긴장감까지 창출하며 단순한 상품광고 이상의 미적 감흥을 자아냈다. 이 광고로 그는 드라마 데뷔 전에 이미 주목받는 신인의 위상을 확보한다. 당시엔 스타들의 브로마이드를 ‘코팅’해 책받침 등으로 쓰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는 브룩 실즈와 피비 캐츠, 소피 마르소 등 서구 미녀들이 판치던 이 시장에서 일대 선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87년 4월 한국방송 신인탤런트 12기 공채시험에 붙은 지 2주만에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주인공으로 낙점된 것도 그의 도드라진 외모의 힘을 말해주는 사례다. 공채시험 직전 한 유명 피디는 따로 그를 불러 대본연습까지 시키며 합격을 예고했다고 한다. 그가 대단한 연기천재가 아니었던 이상 그런 예외를 가능하게 했던 데는 놀랄만한 미모 외에 달리 까닭이 있을 리 없었다.

결혼과 함께 떠난 방송 <빙점>으로 돌아왔다. 딸역 아닌 어머니역으로‥

그의 아름다움은 두번째 작품 <토지>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창출하기에 이른다. 쇠락해가는 명문가를 홀로 지탱하는 주인공 서희의 서늘한 분위기는 갓 스물이 되며 절정에 오른 그의 도도한 아름다움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이후로도 그의 이미지가 늘 서희를 중심으로 공전하기에 이른 것은 아쉬움을 남긴다. 신인으로서 자신의 아우라를 갖는다는 건 큰 행운이었지만, 너무 일찍 한 절정에 도달한 데 따른 골도 적잖이 깊었다. 그는 이후로도 <수요일엔 모짜르트를 듣는다> <삼국기> <아그네스를 위하여> <땅끝에 선 연인> <부자유친> 등에 출연하며 존재를 과시하지만, 서희를 넘어서는 새로운 미의 영역은 끝내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96년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은퇴한다.

그가 8년만에 다시 드라마로 복귀했다. 지난 4일부터 방송되는 문화방송 아침드라마 <빙점>(극본 조희, 연출 서병문)의 주인공 하윤희 역이다. 일본 작가 미우라 아야코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이 작품에서 그는 남편의 후배와 밀회를 나누다 유괴범의 손에 딸을 잃고, 남편이 복수를 위해 입양한 유괴범의 딸을 키우는 비극적 배역을 연기한다. 겉으로는 현숙하지만, 내면엔 뜨겁게 농익은 정념이 흐르는 여인이다.

세월이 무심하다고? 눈가에 주름은 늘었지만 연기도 사람도 편한걸

“사실 처음 제의를 받으면서는 윤희가 입양한 딸 역할이 아닐까 기대도 했어요.” 드라마는 30대 중반에서 시작하는 윤희 연배의 이야기와 십수년이 지난 뒤 대학생이 된 유괴범의 딸과 윤희의 아들 사이에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 등 크게 두 겹으로 이뤄진다. 90년대 초반 이미연과 선우재덕, 손창민 등이 주연으로 나왔던 드라마 <빙점>에선 딸 세대 이야기를 중심으로 극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번 <빙점>에선 세대를 건너뛰어 남편 역을 맡은 선우재덕과 함께 하게 됐으니, 세월의 무게 앞에 어떤 상실감을 느끼지나 않았을까? “이 나이에 이런 드라마 하는 게 감사할 뿐이예요. 눈가에 주름이야 늘었죠. 이등병이 일병, 상병 되듯 훈장같은 거라고 봅니다.” 그는 극중 쇼팽을 연주하는 장면을 소화하기 위해 아는 대학교수로부터 틈틈이 개인 레슨을 받을 정도로 윤희 역에 푹 빠져 산다고 했다.

화려한 인기스타의 생활을 접고 미군 군의관인 남편을 따라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온 세월에 아쉬움은 없을까? 그는 미국에서 6년간 생활하며 딸 진아(7)를 낳았고, 2년전 남편의 근무발령을 따라 대구로 왔다. “5년 동안 연애했는데 살아보니 더 좋더라고요. 이전엔 저도 모르는 새 스타가 돼 혼자만의 삶에 익숙했는데, 함께 하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된 귀한 시간이었어요.”

남편은 “심장이 떨려” 아직 그가 나오는 드라마를 못본다고 하면서도, 그가 고속철도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있을 때면 아이 숙제도 도와주고 엄마 역할을 척척 해낸다고 한다. “그동안 함께 한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다시 가족 지지를 받으며 연기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봐요. 옛날보다 연기도, 사람 대하는 것도 훨씬 편해졌어요.”

그래서일까? 8일 상명대 캠퍼스에서 만난 그의 모습에선 적당한 여유가 묻어났다. 이날 촬영분인 윤희의 대학시절 회상 장면을 위해 그는 예전의 긴 생머리를 한 채 카메라 앞에 섰다. “정말 옛날 그대로예요, 언니.” 그의 코디네이터가 몇차례 탄성을 냈다. 평소 촬영 땐 퍼머머리를 했더니, 나이들어 보인다는 지적이 적잖이 들어오는게 코디네이터 입장에선 꽤 불만이었단다. “감독님이 극중 배역에 맞는 분장을 강조하니 따르는 게 당연하다고 봐요. 나이에 맞는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는 게 연기자란 직업의 매력 아닌가요. 그래도 젊게 보인다니 기분은 좋네요.” 가을에서 갑자기 여름으로 돌아간 듯한 날씨 탓에 촬영에 몰두하는 그의 콧등에 잠깐 옅은 물기가 어렸지만, 곧 언덕바지 숲그늘 사이로 바람이 불더니 그의 생머리를 가볍게 흩날렸다.

사진=이종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