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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조선희의 부산의 추억 - 시월의 유혹
2004-10-08

부산에 오기 전에 나는 <씨네21>을 보면서 관람영화 리스트를 만들었다. 1순위는 국내에서 절대 개봉안할 것처럼 생긴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와 <사회적 학살>, 그리고 개봉 여부와 상관없이 에밀 쿠스투리차 신작 <인생은 기적처럼>(상영시간 154분, 자그마치 2시간34분. 개봉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2순위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다큐멘터리 <슈퍼사이즈 미> <타네이션>. 여기다 <미낙시>라는 인도 영화. 인도영화는 효과100%의 자장가라는 선입관 때문에 비싼 KTX 타고 가서 볼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5년 동안 소설을 못 쓰고 방황하는 소설가’가 주인공이라는 작품소개를 보니 나 비슷한 사람이 있구나 하는 반가움이 일었다. 하지만 부산에 머무는 건 개막날부터 2박3일간, 안타깝지만 몇편은 탈락이다. 입장권은? 못 구해도 좋다. 부산에서 놀면 되니까.

나는 이제 영화와 무관한 사람이지만 해마다 부산영화제 때는 들뜬다. 부산영화제가 나를 끄는 건 영화 때문만은 아니다. 일년에 한번쯤 온통 떠들썩한 축제의 공간에 있고 싶은 욕망도 있다. 하지만 이 가을날의 해안도시에서가 아니라면 그저그럴 것이다. 그야말로 ‘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지는’ 시월의 유혹이다. 영화제에서 영화는 콩나물국 속에 들어있는 콩나물이다. 하지만 콩나물국은 역시 국물맛이다.

이 곳에 영화를 들고 오는 감독과 배우들은 굉장히 행복할 것 같다. 그런데 영화제가 돌아올 때마다 명절을 맞는 주부들처럼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썰렁해진다. 누군가 안방에서 고스톱 치는 동안 부엌에서 다리가 붓도록 서서 설거지를 하는 누군가도 있을 것이다. 연일 계속되는 축제의 밤에 야근하느라 잠 못 드는 누군가가…. 밤을 꼬박새서 영화제데일리를 만들고 닭울음 환청이 들리는 새벽에야 숙소로 돌아왔는데, 첫 영화가 상영되기 전의 영화관들과 게스트들이 외출하기 전의 호텔 로비에 이것들이 모두 배포돼있어야 하건만, 배달차량은 어디선가 교통체증에 막혀 씩씩대고 있고…. 96년 영화제 첫해에 데일리를 만들었던 곳은 중앙동 부산호텔 앞의 낡은 건물 3층이었다. 그 뒤 97년 남포동 레츠미화당 꼭대기층에 백화점 간부들이 아침회의를 하던 바로 옆방을 거쳐, 98년 부산극장 맞은편 한 증권회사가 철수를 하고 비워둔 펜트하우스 규모의 썰렁하지만 쾌적했던 사무실, 그리고 99년 남포동 부산 데파트 영화제조직위의 그 비좁고 푹푹 쪘던 구석방까지. 그 4년 동안 나는 개막식을 한번도 직접 보지 못했다. 수영만에서 폭죽이 터지는 동안 사무실에서 내 머리에 김이 솔솔 나고 있었다. 그래봤자 새벽까지 일이 늘어지기는 마찬가지였건만. 그러니 남동철씨! 시간은 지금 저축했다 나중에 이자 붙여 타먹는 게 아닙디다. 개막식 구경도 하고 슬렁슬렁 놀아가면서 하쇼!

조선희(소설가, 전 <씨네21>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