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벤처기업에 불려가서 두달쯤 버티다가 ‘이 길이 아닌개벼’하면서 집으로 유턴한 지가 얼마 안 되는데, 한국적 벤처에서 요구되는 에스프리가 다름 아닌 ‘가미가제 정신’이 아닐까, 하는 결론을 퇴직금조로 얻었다. 인생이란 게 어차피 죽음을 향한 인간의 자살공격이긴 하지만, 영화주인공들처럼 죽음을 앞두고 재담을 지껄여대는 정도의 여유는 부릴 수 있어야 할 텐데, 벤처에서는 그런 시간낭비가 허용되지 않던 것이었다.
휠체어에서 일어나며 “내 앞에서 두번 다시 안 된다는 말은 하지 말라”던 <진주만>의 프랭클린 루스벨트처럼, 모든 것을 인간 의지와 능력의 문제로 환원시키고, 그에 따라 삶의 질을 따지는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는 기업환경을 확인하고, 내가 오래 몸담았던 어느 언론사가 얼마나 비기업적인 아마추어들의 낭만적 집단이었나를 깨달은 것으로, 두달간의 외도는 끝났다. 두번 다시 돈벌이 전문가들의 세계를 기웃거리지 않으리라, 이제부턴 어떤 보스도 섬기지 않으리라, 결심한 아줌마는 저한테 주어진 하루 스물네 시간을 지멋대로 쓰면서, 여유로운 가난을 즐기고 있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세 시간 동안 재미있게 봤는데 그 재미의 상당부분이 트집잡는 재미였던 <진주만>에서도 가장 거슬렸던 것이 바로 루스벨트의 그 대사와, 죽음도 겁내지 않는 탑건들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 그렇게 낙관적이고 왜 그렇게 겁들이 없는 거지?
지금보다 훨씬 젊고 훨씬 가난했던 시절, 아줌마도 한때 모든 게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마인드 컨트롤 관련 책들이 서점을 휩쓸었던 그때, 아줌마는 교정 앵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권이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책이었다. 그 책을 열댓번 보면서 아줌마도 한동안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해서 삶이 달라질 수만 있다면, 까짓 이빨 정도 못 악물겠어, 생각했는데 팍팍 늙어가는 노안에 젊은 눈 못보는 ‘캔 두’의 그늘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핏 무해해 보이는 ‘캔 두’ 슬로건조차 사실은 시스템이 원하는 인간을 제조해내기 위한 집단최면술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의심. ‘캔 두’라는 건 사실은 할 수 있는데 안 한다는 비난이요, 따라서 세상에는 할 수 없는 게 더 많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적 주술 아닌가 하는. 오로지 자기의지를 실험하느라고 자기의지에 원천적으로 족쇄를 채우는 시스템의 장치에 대해서는 눈돌릴 겨를이 없게 만드는. 도쿄공습만 해도 루스벨트의 ‘캔 두’지 벤 애플렉 같은 조종사의 ‘캔 두’는 아닌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벤 애플렉은 자살공격에 ‘자기 의지’로 동원된 게 아니라는 거다. 그는 억지로 영웅이 된 것이다. 죽어가는 척하는 진주만 세트의 엑스트라들이 몇번이고 외친 대사, “나는 죽고 싶지 않아요”가 사실은 모든 인간의 진심이니까.할 수 없고 해선 안 되는 게 있는데 주변에서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다니까,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공포보다도 자기 자신의 무능력에 대한 공포에 떠느라고, 그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고 앉아 있지 않는가 말이다. 자살공격인 도쿄공습에 두말없이 뽑혀간 벤 애플렉이나 군대에 아무 의문없이 입대하는 우리 청년들처럼, 자기 의지가 아니고 해서도 안 되는 선택을 자기 의지로 착각하면서 하고 있는 거다. 그런 인간들이 지금 차지한 공중그네 같은 자리를 ‘캔 두’ 정신과 자기 선택의 전리품으로 착각하고 자랑스럽게 자기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거고.
두 번째 트집으로 넘어가서, 도대체 무엇이 용감이냐 하는 문제. 일제 미제 할 것없이 죽음을 향해 부나비 같이 뛰어드는 <진주만>의 탑건들을 보면서, 용감한 사람은 겨우 조국 하나 구할지 몰라도, 겁쟁이들은 자신과 세상을 동시에 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겁낼 건 겁내는 게 정상 아닌가. 자기 죽는 것보다도, 오로지 적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개떼처럼 죽여야 하는 그런 상황을 겁내야 하는 거 아닌가. 사람 죽이는 일 앞에서 그다지도 망설임과 죄책감이 없을 수가 있는가. 그러니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 이 한목숨 바치겠다는 사람보다 내 행복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 조국이여 지발 날 냅둬달라고 비는 사람이, 인류평화에 덜 해를 끼치는 건 아닌가. 애국심이라는 집단최면 속에서 좀비처럼 동원될 때, 베트남 참전군인처럼 나중에 억울해서 죽을 지경인 대접을 받아도 할말 없는 건 아닌가.
군소리인 줄 알지만, 겁없는 사람들이 일 낸다는 증거를 하나만 더 들자면, 남자들은 왜 결혼을 겁내지 않는가 하는 문제. 내가 어떤 한 인격체를 데려다가 바야흐로 식모로 노예로 씨받이로 부려먹을 참인데, 그런 결정에 대해서 대단히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천벌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마땅한 거 아니야? 맏며느리로 살던 오래 전 옛날, 아줌마는 왜 다른 식구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편한테도, 너 같으면 이렇게 살고 싶겠어?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물었다. 여자로 태어났고 결혼했기 때문에,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낳고 남편 시댁식구 수발들고, 그리고 남는 시간에 자기 일하면서도 눈치봐야 하는 삶이라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왜 깨닫지 못할까, 궁금했다. 이런 사회라면, 남자들은 결혼할 때 조금은 겁내야 하는 거 아니야?
<진주만>에서 벤 애플렉은 존경하는 지휘관 두리틀 중령(포로체질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자살공격으로 인생을 마감하겠다는 끔찍한 명언을 남긴 전쟁 영웅)에게 두번이나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아줌마라면, <진주만> 영화에 다른 평론가들이 안 줄 수 없어서 준 별점 두세개마저도 모조리 수거해서, 하느님께 돌려주겠다.최보은/ 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