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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의 무시무시한 힘, 바흐만 고바디의 작품세계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고향의 노래>에 구현된 바흐만 고바디의 작품세계

바흐만 고바디의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2000)을 보면서 흥미롭게 여겼던 것 가운데 하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숏이 고바디의 두 번째 장편영화인 <고향의 노래>(2002)의 그것과 놀랄 만큼 흡사하다는 사실이었다(나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을 <고향의 노래>보다 나중에 보았다. 오래도록 씨네큐브 극장 로비에 붙어 있던 영화포스터만 보는 데 지쳐 결국 DVD를 구입해서 보고 말았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주인공 아윱이 퇴행성 질병을 앓고 있는 형 마디를 등에 업고 노새를 끌며 국경을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아윱 앞에는 이란과 이라크 국경임을 나타내는 철조망이 새하얀 눈밭을 가로질러 길게 드리워져 있다. 철조망을 넘은 아윱은 프레임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한편 <고향의 노래>에서 오래전에 헤어진 아내 하나레를 찾기 위해 두 아들을 데리고 먼 길을 여행했던 쿠르드족 노인 미르자는 끝내 아내를 만나지 못한다. 그는 아내가 자신의 옛 친구와 낳은 딸아이를 데리고 발걸음을 돌린다. 눈밭을 따라 걷던 그 앞에 아윱이 지나갔던 그것과 같은 철조망이 나타난다. 등에 딸아이를 업은 그는 철조망을 넘어 프레임 왼쪽으로 사라진다. 두 영화의 마지막 숏은 거의 동일한 촬영각도에서, 거의 동일한 크기로- 카메라쪽으로 향해 걸어오는 인물을 정면에서 촬영한 롱숏- 촬영됐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의 마디와 <고향의 노래>의 하나레의 딸이 입고 있는 점퍼는 모두 노란색이다.

키아로스타미의 적자임을 부인하는 바흐만 고하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과 <고향의 노래>의 마지막 숏이 그토록 기이하게 보이는 것은, “프레임 밖으로 나가는 그들의 발걸음, 그것은 곧 그들이 스크린 너머 현실로 진입하는 발걸음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머릿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행보”(홍성남, <씨네21> 제463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지막 숏들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듯 보이는 장면이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초반부에 등장한다. 밀수업자에게 고용되어 트럭 뒤칸에 올라탄 아이들 가운데 이라크 출신의 아이들이 검문소에 도착하기 직전 트럭에서 뛰어내려 눈 덮인 산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장면은 덮개가 있는 짐칸쪽에서 트럭 뒤쪽의 풍경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촬영됐는데, 이때 뛰어내린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트럭 위 아이들의 모습은 흡사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는 관객처럼 보인다. 이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곧 ‘영화-현실’이며, 이는 아무런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충격적인 ‘사건으로서의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바흐만 고바디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색적인’ 영화들에 대해 상당한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는 의식적으로 그의 스타일에 저항하고자 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는 고바디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드러난다. “키아로스타미가 내게 <꿀벌>(Honeybee)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아이디어를 준 적이 있지만, 잠시 생각해본 뒤에 나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키아로스타미가 다른 이들에게 끼친 영향을 나는 전혀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2000년 칸영화제는 매우 흥미로운 선택을 한 셈이다. 이해의 칸영화제는 무려 세명의 이란 감독, 그것도 키아로스타미나 모흐센 마흐말바프 같은 거장들의 뒤를 이을 것으로 짐작되는 신세대 감독들에게 상을 안겨주었다. 사미라 마흐말바프는 <칠판>으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고, 바흐만 고바디와 하산 엑타파나(<도메>)는 신인감독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이때 자신의 영화에서 키아로스타미의 영화와 닮은 부분은 단 한개의 숏도 없다고 주장하는 고바디와 달리, 엑타파나는 스스로가 키아로스타미의 자장 안에 있음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지극히 엄격하고 정밀하게 유사한 장면들을 반복해가며 차근차근 정서를 구축하는 엑타파나의 데뷔작 <도메>는, 특히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와 (그 자신이 조감독을 맡았던) <체리 향기>(1997)의 영향을 진하게 드러내는 작품이었다(참고로, 엑타파나의 두 번째 영화는 올해 로카르노영화제에 초청됐다). 즉 2000년의 칸영화제는 키아로스타미와 마흐말바프라는 커다란 두축이 앞으로의 이란영화에서 신세대 감독들에 의해 어떻게 계승, 변형, 부인될 것인가를 점쳐보았던 셈이다.

<취한 말들을…>의 잔혹한 현실주의 -> <고향의 노래>의 흥겨운 초현실주의

고바디의 두 번째 장편영화 <고향의 노래>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이 작품에서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영화를 떠올렸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 보여준 견딜 수 없는 삶의 잔혹함은 여기서 불가해한 유머와 뒤섞여 기묘하게 초현실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응당 흥겨워야 할 결혼식은 그것을 방해하는 훼방꾼과 그 훼방꾼을 저지하려는 인물 사이의 총격전으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인물들의 머리 위로는 시시각각 이라크군의 전투기가 날아오고 때로는 폭격에 맞아 한 마을이 통째로 잿더미로 화하기도 한다. 이라크에 있는 아내를 찾아 이 부조리한 현장을 가로지르는 노악사와 그의 두 아들은 힘겨운 삶에 지친 이들을 위해 기꺼이 흥겨운 음악을 선사한다. 이때 그들이 여행 중에 만난 한 선생이 아이들에게 비행기가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현장학습’(?) 장면보다 그곳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달리 없을 것이다. 폭격을 위해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를 보며 선생은 말한다. “비행기는 두 가지 기능을 한단다. 하나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실어나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이지.”

고바디의 두편의 영화에는 모두 ‘경계’(境界)와 관련된 것, 특히 ‘경계에서 살아간다는 것’ 혹은 ‘경계를 넘는다는 것’이라고 부를 만한 주제적 모티브들이 등장한다. 물론 이것은 두편의 영화가 모두 이란-이라크 국경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쿠르드족의 삶을 다루고 있는 것인 만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고바디가 ‘경계’와 관련된 것을 작품의 주된 모티브로 삼고 있는 것에는 좀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사실 그의 영화들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삶과 영화를 가르는 시간적-공간적 거리에 대한 불안이며, 그 거리를 가로지르며 둘 사이를 연결하고자 하는 불가능한 시도로부터 비롯된 긴장과 떨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바디는 스크린을 상처로 물들이는 현실의 힘으로 영화적 환영에 충격을 부여하고자 한다. 고바디의 영화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이란영화들 가운데서도 매우 독특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이는 그가 이란 감독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게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동정심’ 따위가 아니라) 강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잔혹한 이미지를 만들어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의 영화, 특히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고통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런데 영화와 삶의 간극에 대한 감독의 강한 자의식이 영화를 보는 이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메커니즘은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일까?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의 쿠르드족들은 주로 밀수업에 의지해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런데 이런 식의 밀수가 가능한 것은 공간적으로 거리가 있는 두 체계, 즉 경계를 사이에 두고 있는 두개의 교환체계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잉여가치의 발생은 불가능하다(밀수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고바디의 영화는 정확히 이 밀수업에 대응한다. 그것은 영화로 재현된 쿠르드족의 삶과 이를 지켜보는 관객의 삶 사이의 차이를 통해 죄책감이라고 하는 잉여가치를 창출한다. 삶과 영화간의 간극을 좁히려는 고바디의 시도는 (쿠르드족들이 실제로 경험했을 삶의 무게에는 못 미치더라도) 적어도 영화를 보는 이들의 삶보다는 훨씬 묵직한 삶을 재현해내는데, 이처럼 영화를 통해 재현된 삶이 우리의 현실적 삶이 감당하기엔 너무 과중한 것일 때 그 잉여분은 죄책감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고바디의 영화는 새롭다기보다는 놀랄 만큼 시대착오적이다. 그의 영화는 삶을 ‘있는 그대로’ 영화화한다는 오래된 리얼리즘의 신화를 반복하지만, 정말 그것이 현실화되었을 때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잉여가치(죄책감)의 무시무시한 힘을 입증함으로써, 네오리얼리즘이 당대의 관객에게 불러일으켰을 무매개적 충격을 오늘날에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우리에게 죄책감을 가능케 하는 차이들, 즉 삶과 삶 사이의 커다란 간극을, 그리고 그 간극 양쪽의 삶을 매개하는 영화의 힘을 재발견하게끔 만든다.

<고향의 노래>의 아름다움과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고바디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식의 잔혹함을 슬며시 감싸안는다. 그는 삶의 충실한 영화화라는 사명으로부터 영화를 통해 삶을 재발견하는 작업으로 옮겨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일까? 그가 <고향의 노래> 이후에 만든 단편 <다프>(2003)- 전주영화제 ‘3인3색’ 작품 가운데 하나로 ‘다프’라는 전통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쿠르드족 가족의 이야기이다- 에서 우리가 고바디의 전작들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한결 평화로운 삶의 리듬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조심스럽게 말하자면, 여기서 고바디는 그가 그토록 부인했던 키아로스타미적 영화의 경계에 한 발짝 다가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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