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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릴레이] <나에게 유일한>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허문영

유럽의 실비오-중동의 아윱‘축복과 저주’ 너무도 다른 성장

<나에게 유일한>의 실비오는 이탈리아 로마에 사는 16살의 고등학생이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의 아윱은 이란의 쿠르드족 마을에 사는 소년이다. 둘은 아마도 동갑이고, 모두 예쁜 눈을 가졌다. 하지만 두 영화를 나란히 보면 두 소년이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두 영화를 성장영화라고 부를 때, 성장은 축복과 저주를 아우르는 텅 빈 말이 된다. 서유럽의 풍요가 축복의 성장을 낳고, 중동의 고난이 저주의 성장을 낳았을 것이다. 두 영화의 또 다른 대립항은 성장영화가 정치를 언급하는 방식이다. 하나는 수없이 언급하면서 정치를 지워버리고, 다른 하나는 전혀 언급하지 않으면서 육중한 정치적 전언에 이른다.

<나에게 유일한>은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익숙한 성장영화다. 성적 호기심, 아버지와 학교의 권위에 대한 불신, 낭만과 일탈에의 동경 같은 성장영화의 코드들이 빼곡하다. 실비오는 학교 점거투쟁을 벌이는 동료들과 여자 친구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그의 진심의 소망은 총각 딱지를 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엔 좌파적 수다가 넘쳐난다. 실비오는 이렇게 말한다. “피델(카스트로), 그람시, 체 게바라의 공통점이 뭔지 아니? 그건 바로 남들이 하지 않은 말을 했다는 거야.”

그들에게 정치는 패션이며 기호품이다. 실비오의 방에는 체 게바라의 사진이 걸려있고, 그의 동료들은 자유를 외치며 학교를 점거하지만, 그들은 단 한번도 타자를 근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동경하는 세 인물이 짊어지려 했던 동시대인들의 물리적 고난을 상기하지 못한다. 이 조잡한 정치의식을 영화는 위장하기는커녕 태연하게 고백한다. 학교 점거를 위해 몰려갈 때 같이 달리던 친구가 묻는다. “그런데, 우리가 데모하는 이유가 뭐지?” 실비오가 답한다. “학교 사유화와 획일적 교육 때문이야.”

영화는 학교가 사유화되는 과정이나 획일적 교육 행태에 한번의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건 소년들에게 핑계일 뿐이다. 그들의 가장 솔직한 구호는 차라리 이것이다. “진부한 일상에 저항하는 방법은 불복종뿐이야.” 그들의 혁명은 모조품이다. 그러니 마침내 한 소녀와의 섹스에 성공했을 때, 그 밖의 모든 건 휴지가 된다. 박제된 좌파의 기호들과 사춘기적 욕망의 뻔뻔스러운 병렬, 그 거침없는 솔직함이 이 영화의 매력이지만, 그것은 축복의 성장을 허락받은 자들의 것이다. 실비오가 고뇌의 얼굴로 달리는 거리와 그 곁을 흐르는 강과 그 강 건너 건축물은 그저 아름답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실은 성장영화가 아니다. 그곳의 성장은 더 이상 성장일 수 없다. 소년들은 이런 노래를 부른다. “인생이란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 하고 나이 들게 하고 저승으로 이끄네.” 그들은 이미 늙어버린 것이다.

조랑말들은 취해 있다. 술을 먹이지 않으면 말들은 거대한 짐을 진 채 혹한을 뚫고 국경의 산악지대를 통과하지 못하며, 생필품 교환은 실패한다. 아윱은 그 말과 함께 지뢰가 묻히고 국경수비대의 총탄이 날아다니며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악을 오르내린다. 소년의 아버지는 지뢰를 밟고 죽었다. 세 동생들의 끼니를 위해, 또 퇴행성 불치병을 앓고 있는 셋째의 7,8개월 수명 연장을 위해 아윱은 취한 말들과 산을 오른다. 행운은 그의 곁에 오지 않으며, 정당한 대가마저 종종 갈취된다. 소년은 아버지의 부재를 탓하지 않으며 자신의 불행의 근원을 따지지 않는다. 플레시백이 불가능한 시간을 살면서 그는 회상하지 않고 징징거리지 않으며 그저 짐을 나르고 고개를 오른다. 사악한 국제정치학은 이 참상의 배후조종자이지만 영화는 묵묵히 소년의 고행을 뒤따른다.

로마의 소년이 첫 섹스로 생애 최고의 열락에 들떠 있을 때, 쿠르드 소년은 머리 숙인 채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이곳에는 단 한마디의 정치 언어도 등장하지 않지만, 그 단호한 정치적 묵언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냉엄하며 순결한 정치 언어다.

아윱과 실비오는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두 영화를 나란히 보면 그 예감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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