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아더>는 왜 재미도 감동도 없는 걸까
<킹 아더>. 재미도 감동도 없다. 하기는 운이 나빴을 수도 있다. 동화적 상상력은 <해리 포터>가, 판타지의 정수는 <반지의 제왕>이 선점해버린 자리에서 선택의 여지는 별로 많지 않았을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관객의 눈은 한껏 높아져 있다. 어지간한 영상기술과 메시지로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힘든 일이다. 빈약한 서사에 매력없는 캐릭터들, 처음부터 끝까지 굉굉대는 음악, 툭하면 하늘로 뜨는 카메라. 억지 웃음을 강요하는 어색한 대사. 말(馬)들은 마치 이 영화의 억지 역사해석처럼 낑낑대면서 달린다. 캐릭터들 사이의 차이점도 없다. 그냥 이름만 다를 뿐이다. 기네비어가 그나마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게 했지만, 가짜 문신을 하고 활을 쏘다가, 떡대만한 남정네들도 갑옷 입고 퍽퍽 쓰러지는 전장에서 맨몸으로 돌진하면서도 무사한 장면에서는 그냥 허탈한 느낌만이 들었을 뿐이다. 빙판에서의 전투장면이 독특하기는 했지만, 얼음이 깨져나가는 장면을 물 아래에서 잡은 장면 말고는 볼 것이 없었다.
갈리하드 등장으로 무색해진 캐릭터들
<킹 아더>의 실패는 애초에 방향 설정이 잘못됐다는 사실에서 유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더 왕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조명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였다는 것이다. 물론, 아더 왕 이야기를 어떤 시각에서 접근하든 그것은 감독의 자유이다. 문제는 그것이 분명한 관점으로 뒷받침되지 않은 안이한 발상이라는 데 있다. 어쩌면 감독은 아더 왕이 실존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으므로, 그쪽으로 접근하면 아주 ‘새로운 역사적 해석’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몇개의 돌멩이들을 가지고 호수 아래에 궁전을 지은 멀린처럼, 감독은 아더가 실존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역사적 가정 단 하나만을 가지고 거대한 궁전을 짓고 싶어했던 것 같다. 멀린의 진짜 가짜 궁전은 상상력이라는 토대 위에 여전히 서 있지만, 이 이상한 가짜 진짜 역사의 궁은 버티고 서 있을 곳이 없다. 더더욱 딱한 것은, 이 영화가 전설의 유명한 주제들과 이미지들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엑스칼리버, 기네비어와 란슬롯의 사랑(이 유명한 주제는 <쌍검의 기사> 란슬롯이 목욕하고 있는 기네비어를 흘끗 훔쳐보는 것으로 처리되고 만다), 바돈 산의 전투와 스톤헨지, 하드리아누스 성벽 등. 결과. 신화는 망가지고, 역사는 우스꽝스러워진다. 영화는 그 이미지들을 사용하는 것이 쑥스럽다는 듯, 그러나 그 유명세는 포기하기 아깝다는 듯, 우물우물 그 이미지들을 내밀었다가 얼른 숨긴다. 마치 스타니스와프 렘의 성공적인 원작 SF소설과 타르코프스키의 형이상학적 해석 사이에 끼여서 이도저도 아니게 돼버렸던 소더버그의 리메이크 <솔라리스>를 볼 때처럼, 갑갑하고 지루했다.
애초에 감독의 야심은 컸던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런 어정쩡한 결과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가정은 이 영화가 아더 왕 전설의 가장 민중적 영웅인 퍼시발을 배제시키고, 그 대신 갈라하드를 등장시켰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는 가장 완벽하다고 알려진 ‘천상의 기사’이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란슬롯, 퍼시발, 가웨인, 보호트 등 기라성 같은 원탁의 기사들이 몽땅 빛을 잃는다. 갈라하드는 무수한 아더 왕 전설 판본 중에서 가장 종교적 판본이라고 불리는 <성배의 탐색> 딱 하나에 나타나는 인물로서 그야말로 신비주의적인 인물이다. 세속적이며 인간미를 풍기는 퍼시발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킹 아더>는 퍼시발 대신 이 인물을 끌어들임으로써 아더 왕 신화의 탈신비화에 적극적이고 야심만만하게 덤벼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체 갈라하드가 이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른 등장인물들도 밍밍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유명한 ‘오월의 매’ 가웨인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호수의 기사 란슬롯도 그리고 기네비어도 모두 빛을 잃고 쓰러진다. 그나마 보호트라고 불리는 보르스가 생생한 편이다. 보호트는 마지막까지 남은 세명의 성배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가장 세속적인 인물이다. 갈라하드는 신비한 트랜스 안에서 죽어버렸고, 퍼시발은 사제가 되는 반면 보호트는 속세로 귀환하여 증언하는 역할을 맡는다. 열한명(이 숫자의 선택에는 점수를 줄 만하다. 예수의 열두 제자에서 하나를 잡아뺐으니까) 아이의 아버지로 나오는 그는 아마도 이 세속적 영웅을 민중적으로 강화시킨 것처럼 보인다. 가장 야심만만한 재해석은, 이 영화 광고에서도 집중적으로 홍보했듯이 기네비어의 이미지이다. 아마도<브리타니아 열왕기>라는 역사적 진정성이 의심되는 연대기에 나오는 로마에 도전했던 맹렬한 여전사 보아디케 여왕의 이미지를 기네비어에게 덧붙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켈트사회에서 여전사의 존재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었다. 많은 역사적 증언들이 켈트 여전사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고, 켈트의 전쟁신은 여신 모르간이다. 영화는 싸움에 나서는 여전사 기네비어의 목에 토크(켈트의 전형적인 금 장신구)를 걸어주고, 문신을 시킴으로써, 이 여성의 켈트 기원을 확인시킨다. 그러나 지워지는 문신이라니! 영화는 기네비어의 속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역시 ‘색다른’이라는 표면적 코드만이 앞섰을 뿐 아더 왕 전설 전체 안에서 그녀가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해석하지 못함으로써 실패한 캐릭터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영화 카피는 그녀가 ‘대지’라고 말한다. 말인즉 맞다. 그녀는 대지이다. 그러나 영화 안에서 그녀가 ‘대지’라는 것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않는다.거기에 제2인자로 그려지는 란슬롯의 싱거움이라니. 그는 ‘쌍검’을 차고 있는데, 신화에서 ‘쌍검’은 ‘야만인’이라고 불리는 발린의 선물이다. 그가 휘두른 ‘고통의 일격’을 당해 어부왕은 낫지 못하는 상처를 입고 젊은 영웅의 도래를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빠지게 된다. 이 ‘쌍검’은 발린의 별명이 ‘야만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선물이다. 그것은 이 존재가 미분화의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공동체를 개별적 분화 이전의 원초의 카오스로 되돌려놓는 존재인 것이다. 그는 쌍둥이 동생과 함께 죽는다. 그것이 그가 들고 다니는 ‘쌍검’의 의미이다. 그런데 왜 호수의 기사 란슬롯은 이 영화에서 뜬금없이 쌍검을 들고 나타난 걸까?
제일 아쉬웠던 것은 멀린이었다. 이 인물은 들여다볼수록 매력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인데, 이 영화에서 전혀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 사실 아더 왕 전설은 멀린의 존재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 인물은 마법사이면서, 동시에 아더의 실질적인 아버지이며, 신학적으로는 “숨은 신”의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그를 뺀 아더 왕 신화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악마의 자식으로서 신에게 종사한다. 이 태생은 아더 왕 신화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는 켈트적 드루이드를 기독교적 외양 안에 통합시킨 존재인 것이다. 성배의 부재도 충분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감독은 성배가 기독교 상징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의 존재를 지워버린 듯한데, 성배는 그 기원에 있어 전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이교적인 상징이다. 성배에 덧붙여진 기독교적 상상력은 가장 원시적이고 이교적인 환상을 누리기 위해 민중적 지혜가 뒤집어쓴 합법적 가장이라고 여겨질 만큼 성배는 순수하게 이교적인 상징이다. 성배는 모험의 시작이며 끝이다. 성배가 없다면 원탁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아더 왕 신화의 여러 판본 중에서 시대적으로 가장 늦고, 동시에 가장 세속적(또는 정치적) 판본이라 할 만한 토머스 맬로리(존 부어맨은 <엑스칼리버>에서 이 판본을 사용한다)의 <아더의 죽음>에서조차 성배는 존재한다.
깊은 이해 없이 거대한 신화를 논한 오류
아더는 이 영화의 주장처럼 5세기경에 브리튼 섬에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물론, 어떤 문헌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뒷받침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전투에 능한 맹장이었으며, 왕이 아니라 일종의 직업군인이었던 듯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유명한 바돈 산의 전투로 인해 색슨족의 브리튼 정복은 반 세기 정도 늦추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지수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왔던 아더와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신화는 신화의 법칙을 따라간다. 그는 역사적 아더와 상관없이 민중의 상상력에 의해 주위의 온갖 신화적 요소들을 통시적으로 공시적으로 끌어당기는 상상력의 핵 같은 역할을 했다. 멀린의 신화, 란슬롯의 신화도 처음에는 전부 따로따로 존재하는 신화였다. 그러다가 뒤에 아더 사이클에 통합된다. 따라서 아더는 거대한 신화적 성운의 상상적 중심이다. 아더라는 이름조차 그것이 실제의 이름이었는지 대단히 의심스럽다. 아더는 켈트어 아르츠(arz)에서 온 것인데, ‘곰’은 켈트 문명에서 ‘왕’의 상징으로 쓰인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인물들도 전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중세기 내내 억압당했던 그노시스, 연금술, 점성술 등 모든 이단적 사상들이 아더 사이클 안에 집약되어 있다. 내가 지금 번역하고 있는 <아더왕 이야기>(전 8권, 뮈토스)조차 그 전모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방대하며, 구성요소 또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아더 왕 이야기가 오랫동안 ‘로망’이라고 불리는 서구사회의 모든 ‘상상적 허구’의 근원에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이 거대한 신화의 역사화에 접근한 일은 그 자체로 무리한 일일 수밖에 없다. 신화는 그것이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황당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아직까지도 그 심리적 생생함을 잃어버리지 않은 인류학적 자료이다. 아더 왕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화의 전모를 알아야 한다. 그것 없이 재해석은 언감생심, 의미없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의 신화 해석은 늘 그렇듯이 불안하지만, <킹 아더>는 할리우드의 인문학적 부박함을 비싼 돈 들여 다시 한번 더 광고하는 결과만을 가져오고 말았다. 야채 가게에서 곡식 자루에 손을 집어넣기를 좋아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으로 그녀의 대지 여신의 성격을 간명하고 명랑하게 드러내 보일 줄 알았던 장 피에르 주네의 <아멜리에>와 안톤 후쿠아의 기네비어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비싼 돈 들여 미끄러지는 기표들.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빙판 위에 자신의 운명을 건 건 의미있는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내년에 나온다는 스필버그의 아더 왕을 한번 기다려보자. 그의 상상력이라면 기대할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