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Y 2차대전 종전을 목전에 둔 일본의 작은 시골마을. 간장선생이라 불리는 의사 아카기(에모토 아키라)는 환자가 생기면 어디든 달려가며, 만병의 근원을 간염이라고 믿고 있는 헌신적 의사다. 창녀 노릇 하다 그의 조수가 된 소노코(아소 구미코), 주정뱅이 승려, 모르핀 중독자 의사, 요정 마담 등이 그의 조력자다. 여기에 탈옥한 네덜란드인 포로까지 가세해 간염의 비밀을 밝히려는 순간 군인들에게 체포된다. 요정 마담의 도움으로 포로 외엔 다 풀려나지만 간염을 향한 아카기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 Review
그가 달려온다. 하얀 양복에 나비 넥타이 그리고 중절모 차림의(전시의 일본 시골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통통한 초로의 남자가 뒤뚱거리며 뛰어온다. 이분이 간장선생이다. 모든 환자들을 간염으로 진단하는, 돌팔이로 의심되지만 그러나 인간성만은 의심할 수 없는, 마을 사람 모두의 주치의이자 정신적 지주 아카기 선생. 그의 모토는 ‘죽을 때까지 달려라’. 환자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밤낮없이 걷지 말고 뛰어가라. 포로 수용소가 있는 작은 일본마을, 공습경보가 울리면 답답하고 불안한 여름 공기를 뚫고 힘차게, 하지만 어딘지 어설픈 자세로 달려가는 매우 특이한 의사와 함께 <간장선생>은 막을 연다.김기덕 감독도 그렇긴 하지만,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우아하게 굴거나 얌전빼는 걸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올해 일흔다섯살이고 40여년 동안 영화를 만들었지만, 우아한 인물을 그의 영화에서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생을 정리할 나이가 됐으니 이제 품위있게 관조의 자세를 취할 법하지만, 이마무라는 여전히 실없는 농담을 툭 던져놓고 낄낄거리는 걸 즐긴다. 그리고 젊은 시절 스스로 주된 관심사라고 밝힌 허리 아래의 문제에 변함없는 애정을 표한다. <우나기>(1997)로 황금종려상을 받고 난 직후에 만든 <간장선생>은 2차대전기를 살아가는 일본의사라는 아주 근엄한 소재를 택하고도 시작할 때부터 농기를 자제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종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욕망과 성”이라는 감독의 소신을 감추지 않는다.
<간장선생>은 묘한 영화다. 한 헌신적 의사의 영웅담이나 휴먼드라마 같기도 하고,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반전영화인 것 같기도 한데 어디에도 딱 들어맞지 않는다. 웃기에는 너무 상황이 심각하고, 심각하게 보려고 하면 어처구니없는 농담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먼저, 아카기는 허준이 아니다. 선한 의사기는 한데 명의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두 간염이라고 주장하는 그의 진단이 맞는지도 그의 처방이 효험이 있는지도 증명되지 않는다. 아키기가 군국주의 지지자가 아닌 건 분명하다. 궁할 때마다 천황폐하를 들먹이지만 진심인지는 불투명하고, 수용소를 탈출한 포로도 기꺼이 치료해준다. 원폭 구름을 퉁퉁 부은 간과 흡사한 모양으로 묘사한 걸 보면 <간장선생>은 체질상 평화주의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실제로 아카기의 피를 끓게 하는 건 환자와 간염뿐이다. 전쟁에도 이념에도 심지어 여자한테도 시큰둥하다. 군의관 아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간장선생은 울면서 “아들아, 너를 위해서도 아비가 간염을 잡으마”라고 다짐한다.
이마무라는 여전히 짓궂은 관찰자다. 일단 그의 카메라에 들어오면 누구도 자신의 누추한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 마을 제의를 주재하지만 창녀 출신(그것도 세 번째 부인) 아내를 데리고 양아치처럼 사는 주정뱅이 승려, 모르핀 중독자이며 허무주의자인 동료 의사 모두 한심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 폐인들이 아카기의 친구다. 여기에 이마무라 영화의 오랜 여성 캐릭터인, 창녀 출신이며 잡초 같은 생명력과 무뇌아에 가까운 저지능의 소유자 소노코가 가담한다. 이들이 모여 제대로 하는 일이라곤 간염 실험 정도지만 그나마도 실패한다. 그들의 반대편에 천황의 충신처럼 굴지만 요정 마담의 몸짓 하나에 완전히 무너지는 수용소 부대장이 있다.
<간장선생>은 이마무라의 영화들이 늘 그랬듯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의 상식적 경계 밖에서 욕망과 집착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동극이다. 아카기 진영의 무구한 휴머니즘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지만 인간의 편집증에 대한 냉정한 관찰을 거두지 않는 것이다. 승려는 술을, 동료 의사는 모르핀의 위안을, 부대장은 요정 마담의 유혹을, 그리고 창녀는 역시 창녀였던 어머니의 “공짜는 안 된다”는 금언을 벗어나지 못한다. 가장 멀쩡해보이는 아카기는 실은 누구보다 편집광적으로 간염에 매달린다. 실험용 간을 얻기 위해 무덤을 파헤치고, 렌즈 하나를 얻기 위해 도쿄로 달려간다. 그러다 결국 한 환자의 진찰 요청을 무시하고, 간염 연구는 도루묵이 된다. 아카기의 편집증은 공중에 뿌린 아들의 편지 조각이 눈처럼 내리며 그의 몸을 덮는 장면에서 절정의 시적 표현을 얻는다.
그래도 주인공 남녀에겐 각성의 계기가 주어진다. 아카기는 자신이 방치한 한 환자의 죽음으로 정신차린다. 소노코는 아카기를 사랑하게 되면서 공짜 불가론을 철회한다. 두 사람이 나룻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마지막 장면에서 바지를 바닷물에 흘려보낸 소노코는 엉덩이를 드러내며 아카기 품에 뛰어든다. 이제 이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이마무라는 마지막까지 짓궂다. 이들 앞에 원폭의 버섯구름이 피어오른다. 간염과 핵무기의 유비를 말하는 건 쉽지만 두 남녀에게 닥친 이 비극은 너무 난데없다. 아키기는 “저건 부은 간의 모양이군” 하고 태연하게 중얼거린다. <간장선생>은 부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도, 끝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는 아리송하고 괴이한 부조리극이다. 허문영 기자
<간장선생>의 대사-농담 속의 진담
“박테리아에도 남녀가 있나요?”
<간장선생>의 스토리는 별다른 굴곡이 없다. 하지만 유머러스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대사들이 종종 허탈한 웃음을 솟게 한다. 이건 이마무라의
특기이며, 그 농담 안에는 도발적인 진담이 숨어있다. 마을 사람들의 상담자 노릇을 해야 하는 승려의 첫 모습은 술에 만취해 아내에게 고함지르는
생양아치 꼴이다. 창녀에 푹 빠진 아들 때문에 찾아온 여인에게 승려는 혀꼬부라진 소리로 말한다. “뭐라고? 그게 뭐 문제야. 이 여자도 창녀였어.
내 세 번째 마누라야. 아니 네 번째인가?” 여인은 이미 아카기한테도 “그래서 어쨌다는 거요”라는 대답을 들은 바 있다. <간장선생>의
주인공들은 모두 창녀 옹호론자처럼 보인다.
헌신적인 조수가 된 창녀 소노코가 현미경으로 박테리아를 관찰하던 아카기에게 순박하게 묻는다. “박테리아도 남녀가 있나요?” “남녀는 따로없고
번식만 계속하지.” “매춘이 없단 말인가요?” “그런 건 자연엔 없어. 모두 자유롭게 짝을 맺지. 인간만 정조를 떠받든단 말이야. 음, 그래도
매춘은 나빠. 인간으로 태어났으니까 말이야.” “박테리아가 되는 게 나을 뻔했어요. 더 재미있잖아요.” 이쯤에서 올해 칸영화제에 출품된 이마무라의
신작에서 정체불명의 노인이 하는 말을 떠올리면 이마무라의 신조를 좀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걸 잊고 여자의 품에 안기게. 일상사의
번뇌를 잊고 자기 욕망에 충실하란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