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진짜 눈물의 공포>
폴란드의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그의 영화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었고 이 영화는 1990년대 한국의 영화광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던 예술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뒤이은 삼색 연작은 잠깐 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실패로 간주되었고 곧 잊혀졌다. 물론 마땅히 걸작으로 불려야 할 <십계> 연작이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다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 폴란드 내에서는 한때 참여적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들을- 예컨대 <야간경비원의 시선>이나 <카메라광> 같은 영화들- 만들던 키에슬로프스키가 후기에 가서 점점 심리적이고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영화들을 만드는 것에 대해 만만찮은 비판들이 가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The Fright of Real Tears | 슬라보예 지젝 지음 | 오영숙 외 옮김| 울력 펴냄)는 이러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무엇보다 그의 후기작들에 대한 정치한 구원비평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특히 3부), 지젝의 목표는 좀더 광범위하고 야심적이다. 바로 전반적인 인문학적 사유의 위기와 함께 난관에 봉착한 영화이론을 대안적인 라캉적 독해를 통해 구원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해체주의/페미니즘/포스트-마르크스주의/정신분석/문화이론 등의 ‘이론’(Theory)과 데이비드 보드웰과 노엘 캐롤을 수장으로 하는 인지주의적 ‘포스트-이론’ 내지는 ‘탈-이론’(Post-Theory)의 ‘사이’에서 키에슬로프스키를 읽어내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이론과 포스트-이론 사이의 키에슬로프스키’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확실히 지젝의 이 저서에 자극제가 되었던 것은 <소셜 텍스트>에 게재된 유명한 패러디논문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던 앨런 소칼의 저서 <지적 사기>와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보드웰과 캐롤의 편저 <포스트-이론> 같은 책들로 인해 빚어진 좌파이론가들 내부의 위기감과 반감이었을 것이다. 지젝은 특유의 정교하고도 유머 넘치는 문장, 그리고 재해석된 헤겔적 개념들을 통해 경험주의적 이론이 가정하는 보편성의 허구를 논박하는가 하면, 이제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정신분석학적 봉합(suture)이론을 새롭게 조명하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언뜻 딱딱하기만 한 이론서일 것도 같지만 책에 언급된 (그리고 이제는 국내에서도 대부분 쉽게 구할 수 있는) 영화들을 함께 보면서 찬찬히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이만큼 박진감 넘치는 이론서도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