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몸 속에는 교통경찰이 있어.” 친구가 내게 던진 말이다. 무너져내릴 듯 바스러질 듯하다가도 끝내 망가지지 못하는 나의 희미한 ‘범생이’ 기질을 말함일까. 그 교통경찰의 호루라기를 빼앗고 오토바이 타이어에 펑크도 내고 싶지만, 몸은 매번 제자리다. 그래서 난 더더욱, 변화하는 것들에 넋을 놓는다. 특히 ‘불혹’을 넘은 나이에 무언가에 진정 ‘혹’해버리는 사람들에게는. 멕 라이언도 그렇다. 다행스럽게도, <인 더 컷>에 로맨틱코미디의 여왕 ‘멕 라이언’은 없다. 영화 속 그녀는 선연한 잡티와 주름 사이로 지친 눈물을 떨구는,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프래니가 되어 있다. 그녀가 모르는 그녀의 열망과 섬광처럼 조우할 때, 변신은 시작된다.
다시는 대면하고 싶지 않은 상처와 꼿꼿이 마주함으로써, 아니 온몸을 상처 속으로(in the cut) 깊숙이 들이밂으로써 프레니는 변화한다. 끔찍이 사랑하는 이복동생이 토막살인당하는 극한의 상처.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살인범으로 몰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걸레가 된 동생의 잘린 머리를 끌어안고 놓지 않는다. 혀가 잘리고 폐가 도려내어지고, 몸 구석구석 빈틈없이 난자된 동생의 죽음, 그 모든 과정을 낱낱이 기억한다. 그녀는 상처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상처가 되어버림으로써 상처를 안으로부터 파괴한다. 그뒤, 머릿속으로만 섹스를 상상하던 소심한 그녀가, 수갑을 채워 남성을 꼼짝 못하게 만들더니, 마침내 그를 ‘천천히 삼킨다’. 자신의 욕망을 두려워하던 그녀는 연인이 바로 동생을 죽인 연쇄살인범이라는 강렬한 의혹 속에서 비로소 한껏 쾌락을 향유한다. 연쇄살인범의 심장에 총을 겨누어 폭력의 고리를 끊는 것도 경찰이 아닌 그녀다.
그러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자신을 둘러싼 ‘시선’을 바꾸는 것이다. <인 더 컷>을 페미니즘 영화로 보는 시선은 영화를 그 자체로 즐기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라는 꼬리표는 끝없이 새로운 존재로 비약하려는 제인 캠피온에게 일종의 ‘화인’(火印)이 아닐까. 내가 <인 더 컷>에서 읽어낸 것은 페미니즘적 시선만은 아니다. 프래니가 흑인속어집을 만들기 위해 지하철 광고판, 행인의 티셔츠에 박힌 글자들, 흑인 제자가 뇌까리는 슬랭에 넋을 빼앗기는 장면들. 프래니는 주류적 역사 속에 틈입할 수 없는 버려진 욕망들, 세상 속에 분명 존재하지만 ‘불결함’을 이유로 방치되는 언어들, 누군가 불러깨우지 않으면 흐느낌 한번없이 사위어갈 존재들의 흔적을 맹렬하게 기록한다. 영화 속 뉴욕은 <섹스&시티>에 등장하는 화려한 뉴요커의 활동무대가 아니라 차라리 인도의 뒷골목을 연상시킬 정도로 잡스럽고 불온하다. 아무도 말을 섞지 않는 대상(속어나 은어로 대변되는 미국의 ‘쌈마이인생’들)에게 말걸기를 통해 익숙한 대상(아메리칸 드림의 상징, 뉴욕)은 섬뜩한 대상으로 거듭난다.
로맨틱코미디가 멕 라이언의 안전판이자 걸림돌이었다면, 페미니즘 역시 제인 캠피온의 알리바이이자 지우고 싶은 문신일 수 있다. 이제 비상을 시작한 멕 라이언, 매번 다른 존재로 날아오르는 제인 캠피온 모두, 날개를 쉬기 위해 안전한 암반을 찾지 않기를.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은 ‘발없는 새’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에는 발없는 새가 있대. 늘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단 한번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라디오를 듣다 루시드 폴의 <왜 날려고 하는데 발이 필요할까>라는 곡에 흠칫 놀라, 읽던 책 덮고 한동안 멍해진다. 빗속에서 루시드 폴의 들리지 않는 속삭임을 듣는다. 왜 착륙하지 못하는 비행은 실패일까. 비상에는 오직 비상이 있을 뿐. 왜 굳이 착륙하려 하지? 착지를 위해 필요한 발바닥을 돌보는 사이 죽어버린 나의 날개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정여울/ 미디어 헌터 suburb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