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은 확실히 데뷔작으로서는 빼어난 완성도를 지닌 영화다. 하지만 보고 나서 별로 할말이 없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다. 즉 이 영화를 ‘재구성’하고픈 욕망을 그다지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밝혀두자면, 이건 <범죄의 재구성>을 비아냥거리려는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재구성’하기보다는 차라리 한번 더 보고 싶다. 그 이유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극장을 나서는 이에게 ‘뭔가 사기당한 기분인데…’라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범죄의 재구성>의 반짝이는 공허함이 약간은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갓 첫 영화를 만들었을 뿐인 최동훈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인지 속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우선 무엇보다 장르에 현혹되어 있는 인물이고 그 안에서 승부를 걸어보려 하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편의 장르영화는 그 자체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지 못한다. 장르영화는 그것을 만드는 작가- 혹은 그의 작품 전체- 그리고 그것과 상호텍스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숱한 영화들의 집합과 관련돼 있는 법이다. 한 작품의 독자성을 주장하며 이런 식의 관련을 불필요한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식의 배중률은 지나치게 독단적이다. 일단 최동훈이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가 좀더 필모그래피를 쌓아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엔 없을 것 같다.
장르 안에서 승부를 걸다
최동훈이 첫 작품만으로 스스로가 장르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재능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을 입증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한 영화적인 재능을 떠나 다른 영화들과의 관련 속에서 <범죄의 재구성>을 생각해볼 때, 솔직히 나는 이 영화가 이른바 ‘강도 영화’(heist movie)의 계보 내에서 줄스 다신의 <리피피>(1955)쪽에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지난해 초에 국내 개봉되었던 <웰컴 투 콜린우드>(2002)- 혹은 이 영화의 원작인 마리오 모니첼리의 <마돈나 거리에서의 한탕>(1958)- 같은 영화쪽에 가까운 것인지 아직은 단정내릴 자신이 없다. 혹은 그 ‘범죄의 재구성’ 방식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킬링>(1956)이나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1992)을 떠올려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그들만의 리그’였던 <오션스 일레븐>(2001)이나 당대 미국에 대한 음울한 초상화를 그려냈던 마이클 치미노의 로드 무비/하이스트 무비 걸작 <선더볼트와 라이트풋>(1974)쪽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여하튼 앞서 언급한 ‘<범죄의 재구성>의 반짝이는 공허함’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감독이 영화를 통해 입증하고자 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불가능한 계획이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무모한 믿음을 가능케 한 것은 두 가지다. 바로 영화라고 하는 유용한 연장과 (한국은행이 아니라) 한국이라고 하는 허술한 금고 덕택이다. 우리가 <범죄의 재구성>을 보고 나서 ‘뭔가 사기당한 기분인데…’ 하는 생각을 품게 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런 생각을 갖도록 만들기에는 빼어난 영화적 속임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즉 속임수를 통해 가려졌던 영화 내부의 공백을 기어이 채워넣고야 마는 바깥의 현실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뭔가 사기당한 기분인데…’ 하는 생각을 품게 되는 시점은 ‘그거, 따져보니 가능할 것도 같은데’라는 음험한 생각을 품게 되는 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이는 사기꾼에게 걸려든 먹이들의 사고이다.
사실 <범죄의 재구성>은 앞서 언급한 여타의 강도 영화의 계보 속에 안착하기보다는 거기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안달이 난 영화 같기도 하다. 우선 이 영화에는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이 빠져 있다. 그럼으로써 ‘완벽한 계획은 반드시 실패하게 마련이다’라고 하는 강도 영화의 교훈을 가볍게 피해나간다. 대개의 강도 영화 장르에서, 감탄할 만큼 멋진 까닭에 오히려 실패가 불가능해 보이는 계획을 수립하는 인간의 지성은, 그 계획을 작동시켜야 하는 인간들 각각이 나름대로 품고 있는 상호 양립이 불가능한 간지(奸智)들 앞에서 무력해진다. 좀 달리 말하자면 집단지성의 뉴런체계를 형성함과 동시에 파괴시키는 개체들에 대한 관찰이 바로 이 장르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것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범죄의 재구성>에서 한국은행을 털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는 5인조가 도무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최창혁(박신양)이 김 선생(백윤식)에게 들고 온 종이쪼가리 하나가 고작이다. 그저 “시추에이션이 좋아!”라는 김 선생의 말밖에는 없다. 당연히 <범죄의 재구성>에 그럴싸한 강탈장면이 등장할 여지 또한 전혀 없어 보인다. 보는 이의 숨을 멎게 만드는 <리피피>식의 강탈 시퀀스 같은 것은, 최동훈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위조당좌수표를 한국은행에 가져가서 현금과 무기명 채권을 받아 차에 싣고 도주하면 그걸로 끝이다. 공들여 찍은 카체이스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보여지는 것이다.사실상 <범죄의 재구성>은 지성이 간지(奸智)를 제압하는 이야기이다. 형을 죽게 만들었던 김 선생에 대한 복수, 그에게 던질 미끼, 계획에 함께 참여한 자들의 배신, 그리고 심지어 ‘구로동 샤론 스톤’(염정아)의 꿍꿍이에 이르기까지 최창혁은 모든 것을 예측하고 계획하고 또 관장한다. 혹은 <범죄의 재구성>은 언젠가 형의 복수를 성사시킬 것을 꿈꾸며, 실제로는 자신의 정부와 함께 여기저기서 사소한 사기사건을 저지르고 다닐 뿐인 사기꾼 최창혁의 몽상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범죄의 재구성> 말미에 덧붙여진 이상한 사족은 정당한 지위를 얻게 된다. 이때 우리는 <범죄의 재구성>에 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영화 자체가 바로 그러한 계획, 불가능한 작전에 대한 몽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강도 영화의 최근 경향
그럼 도대체 <범죄의 재구성>은 어떤 영화인가? 이 영화에서 기대했던 것들은 정작 나타나지 않는데도 무언가를 본 것 같은 착각이 들게 만드는 것은 왜일까? 그건 당연히 플래시백을 전면적으로 활용한 이 영화의 서사구조, 실제 사기꾼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구성했다고 하는 캐릭터와 그들이 내뱉는 대사 때문이다. 또한 종종 우리의 신문지면 귀퉁이를 차지하는 자잘한 사기사건- 혼인빙자사기, 부동산 사기 등등- 들의 삽입은 여하간 이 모든 일이 정말로 여기서 벌어질 수도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연상적으로 깨닫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을 엮어 ‘접시를 돌리는’ 감독의 솜씨는 확실히 상찬할 만하다.
그런 까닭에 <범죄의 재구성>이 “머리와 싸우는 영화가 아니라 눈을 홀리는 영화”이며 사실상 엉성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감추기 위해 플래시백을 통해 ‘범죄를 재구성’하고 있을 뿐이라고 한 정성일의 지적은- <범죄의 재구성>은 눈을 홀릴 뿐 아니라 귀까지 홀리는 영화라는 것을 (어쩌면 의도적으로) 빼먹은 것만 제외하면-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다. 그런데 문제는 정성일이 다음과 같은 단언을 덧붙이는 순간 발생한다. “눈은 항상 부주의하고 비논리적이며 우매한 감각이다.” 내가 보기에 대중영화는 우리의 우매한 감각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 허용되는 예술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우매한 감각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시청각적 자극을 통해 감각을 더욱 무디게 하고 그 무뎌진 감각을 빌미 삼아 우리를 속여넘기려 할 때이다. 하지만 적어도 <범죄의 재구성>은 그런 ‘꼼수’를 쓰지는 않는다. 보는 동안엔 아무리 감각을 곤두세워도 모든 게 그럴싸해 보인다. 그게 사기의 본질이다. 또한 글머리에서 내가 <범죄의 재구성>이 보고 나서 별로 할말이 없게 만드는 영화이며 ‘재구성’하고픈 욕망을 별로 불러일으키지 않는다고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할말이 없으면 침묵하면 된다. 또한 배스킨라빈스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이 따뜻하지 않다고 해서 불평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시 한번, 굳이 <범죄의 재구성>의 계보상의 위치를 묻는다면? 1950년대의 음울한 강도 영화들보다는 최근의 것들, 그 가운데서도 <이탈리안 잡>(2003)과 <웰컴 투 콜린우드>를 반반씩 섞어놓은 것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른 구성과 복수라는 모티브에서는 전자의 영화를, 도무지 계획을 성공시킬 것 같지 않은 ‘땅에 붙은’ 캐릭터들의 묘사에서는 후자의 영화를 닮았다. <범죄의 재구성>은 점점 더 교훈도 모럴도 없는 순수한 장르적 쾌감의 세계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오늘날 강도 영화의 경향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이들 영화에서 점점 과거의 대가들이 스스로의 인물들을 향해 쏟아부었던 페티시에 가까운 매혹과 애착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미지의 밀도는 상실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플롯과 사기그릇 같은 캐릭터들뿐이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영화가 ‘싸이더스표’ 영화라는 것이다. 기어이 최창혁을 찾아낸 김 선생이 그와 맞붙는 장면에서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여기서 나는 <살인의 추억>(2003)과 <지구를 지켜라!>(2003)- 여기서는 실제 비는 아니고 천장에 달린 스프링클러에서 떨어져내리는 물이기는 하지만- 의 클라이맥스를 떠올리고 있다. 어느새 비는, 우리의 젊은 감독들이 만들어내는 장르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위한 상투적 소재가 되어버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