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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로 잡아내는 폭력 바이러스, <인플루엔자> 촬영현장
오정연 2004-03-31

언제나 다양한 컨셉의 실험이 이루어졌던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3인3색 프로젝트. 올해는 중국의 유릭와이, 일본의 이시이 소고, 한국의 봉준호가 참여해 4월 초 완성을 목표로 각자 작업 중이다. 이중 봉준호 감독의 <인플루엔자>는 조혁래라는 인물이 5년에 걸쳐 점점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CCTV 화면으로 보여준다. 지난 3월21일 지하철 을지로입구역 지하도에서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 촬영 분량은 단 한컷이며 이것은 영화 전체에서 유일하게 카메라가 움직이는 장면. 무자비한 구타현장을 무표정하게 지나치거나, 휴대폰과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스테디캠을 통해 한 테이크로 보여진다. 이날 촬영이 종료된 직후, 작업 중인 영화에 대한 감독의 설명을 들었다.

“<모자이크 다큐멘터리: 인간 조혁래>였던 제목이 <인플루엔자>로 바뀌었다. 직접적인 폭력바이러스의 전염이 아니라 난무하는 폭력에 사람들이 익숙해짐을 의미한다. 요즘에는 사회적으로 일상화된 폭력이 느껴진다. 얼마 전 택시를 탔는데, 합승한 손님과 운전기사의 대화가 이런 식이었다. ‘제가 300만 신용불량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중에 100만명은 예비강도라고 봐야죠. 그래도 웬만하면 사람은 해치지 마십쇼.’ ‘저도 그러려는데 딴 방법이 없네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하게 됐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을 내세운 앞의 이야기와는 별개로 붙는 에필로그다. 앞선 이야기는 날짜가 선명히 박힌 흑백화면으로 소개되지만, 마지막 장면은 ‘현재’라는 자막이 뜨면서 컬러로 전환된다. 원래 시나리오상에는 ‘길을 걸어가던 평범한 사람들이 갑자기 생지옥을 벌이면서 폭력을 행사하다가 다시 평온을 찾는다’고 써 있는데, 이것이 너무 직설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누군가 그런 폭력을 당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친다는 것으로 바꿨다. CCTV를 끌어들인 것은, 그처럼 실제라는 전제를 강하게 전달하는 매체를 이용해서 ‘표면적인 사실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업이, 황당한 재앙을 표피적으로는 사실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다음 장편과 ‘사실성’에 대한 실험이라는 의미에서 연결된다. 첫 디지털 작업을 하면서 어려움보다는 재미와 신기함이 많다. 구석진 공간까지 이용하거나, 행인들 속에 배우들을 밀어넣고 촬영하는 것은 디지털이기에 가능한 점이다.”

사진 이혜정·글 오정연

△ 고정된 CCTV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의도적인 화질열화를 계획하고 있는 <인플루엔자>에는 촬영, 조명감독이 없다. 영상원 전문사 과정의 김병정씨가 이 장면에서는 스테디캠 촬영을 맡았다. 영화는 DVX100A와 김병정씨의 PD 150, 두대의 카메라로 촬영됐다. (왼쪽 사진)

△ 촬영현장을 구경하고 있는 듯 보였던 사람들이 감독의 사인과 함께 일제히 자신의 위치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일종의 기괴한 퍼포먼스 현장을 방불케 했다. 11번의 테이크가 반복되는 동안 수십명의 보조출연자들은 평범하게 걸어다니는 연기를 정확하게 해냈다. (오른쪽 사진)

△ “연기보다는 행동이 필요한 영화”라는 것이 감독의 설명. 봉준호는 이들 3명이 차가운 복도에 쓰러진 소년에게 가하는 액션을 세심하게 연출했다. “이렇게 벽을 툭툭 치다가, 머리를 한번 건드려보는 거야. 근데 진짜 쇠파이프 없나?” (왼쪽 사진)

△ 그냥 지나치거나 심드렁한 호기심으로 카메라를 들이대거나. 휴대폰 카메라와 디지털 카메라가 유행하면서 모든 일상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의 씁쓸한 모습이, 그들의 카메라에서 뿜어져나오는 무미건조한 플래시 불빛과 함께 더욱 강조된다. (오른쪽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