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률씨의 설익은 이분법 논리를 비판한다
우리는 괴물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같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권력의 편으로부터 우리를 저항의 입장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우리가 바꾸어야 하는 것은 사회의 모순이지, 그 모순 속에서 태어난 예술 작품(혹은 비평)이어서는 안 된다.
-인터넷상 블로그에서, 사드에 대해 푸코가 한 말
지난 5년간, 학생들과의 사석에서 술자리를 갖거나, 특강 뒤의 질문 시간에, 혹은 메타 비평을 써보라고 내준 작문에서, ‘입을 찢어버리겠다’는 욕설이 담긴 이메일까지 사람들은 특히 남학생들은 비슷한 질문과 그보다 더 비슷한 질문을 하곤 했다. ‘전 김기덕을 좋아합니다. 그는 이런이런 장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왜….’ 이 소리가 김기덕 감독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성폭력 예방을 위한 세미나 시간에도 나오니, 섬이란 평론이 내게는 참 질기고도 긴 업보인가보다.
그러므로 강성률씨에 대한 이 반론은 섬에 대한 그간의 반론, 재반론, 김기덕 감독과의 인터뷰, 메타 비평 이 모든 것에 대한 갈무리이자 ‘마지막’ 소회임을 밝혀둔다. 즉 나는 더이상 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김기덕 감독이 거장이 되든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을 타든 영화교과서에 영원히 남을 감독이 되든 상관하지 않겠다(나는 김기덕에 관한 평가가 아닌 연구를 하고 싶다). <사마리아>를 보며 나는 마지막 결론을 내렸다. 김기덕, 그의 핵심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여성들의 자궁과 질을 헤매며 도를 닦고 있는 이 감독의 ‘창녀냐 성녀냐’ 하는 그 고전적인 여성관에 격분하는 일도 이제는 지겹다. 그러므로 이 글은 강성률씨의 섬의 메타 비평에 대한, 지면에서 마지막으로 감행하는, 심영섭을 포함한 페미니즘 비평가에 대한 개인적인 최후 변론이 될 것이다.
여성을 ‘어떻게’ 보는가지난 <씨네21> 443호에 실린 강성률씨의 섬에 관한 메타 비평을 읽어 보았다. 그 글의 내용을 차치하고서라도, 이게 영화과 대학원에서 페미니즘을 배웠다는 사람의 메타 비평인가 싶어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의 비평은 이제까지 내가 읽은 섬에 관한 많은 메타 비평, 학교에서 받아본 혹은 인터넷에 올라온 아마추어 비평가들의 비평 수준과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라 실망이 컸다(그 이유는 지금부터 밝혀나가고자 한다). 이제 와서 웬 ‘섬’이며, 반론을 쓰지 말까 정말 이 글이 며칠을 공을 들여 읽고 또 읽어서 반론을 쓸 가치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강성률씨의 주장대로 이번에 반론을 안 쓰면 그의 반론을 받아들인 것이라 믿을까봐 이렇게 펜을 든다. 읽어보니 그 글은 강성률씨 개인의 반론일 뿐 아니라 강성률씨를 대표하는 일단의 사람들이 페미니즘 비평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오해와 무의식적인 적대감의 표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페미니즘이란 이데올로기를 뭉뚱그려 페미니스트란 단 하나의 침대에 집어넣어 페미니즘 평론과 그 평론가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잘라버리는 그 획일적인 논리에 대해서 말이다.
강성률씨는 일단 그의 글에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이런이런 장점도 있는데,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김기덕 영화를 두고 너무나도 극단적인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리곤 주유신과 심영섭 같은 페미니즘 비평가들의 비평은 이 영화를 보거나 지지한 사람은 여성을 혐오하거나 위협하게 되고 졸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 혐오증자가 되게 만드는 일종의 흑백 논리이며 김기덕 감독의 영화보다 더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강성률씨는 이런 비평을 읽으면 섬뜩함을 느낀단다. 나는 이런 비평을 읽으면 웃음이 나온다. 일단 여성 평론가의 글이 무슨 김기덕 감독에 대한 테러인 양 극단적인 폭력인 양 이야기하고 있는데, 원래 폭력이란 쌍방적인 것이지 일방적인 것이 아니지 않은가? 김기덕 감독이 가만히 있었는데 여성 평론가들이 비평 글을 썼는가? 순진한 여대생처럼 가만히 벤치에 앉아 있는 김기덕이란 감독을 신체포기 각서를 받고 잔혹한 비평의 정글에 팔아버린 경우는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이후 강성률씨는 주유신보다 더 심각한 비평가가 심영섭이라며, 심영섭의 섬의 비평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그(심영섭)는 <섬>을 두고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의 욕망은, 동물적이라기보다 짐승적이라기보다 사랑받지 못하고 보살핌이 무언지조차 모르는 정신과 환자의 비극적인 복수 충동에 가깝게 보인다’고 말했다. 감독 김기덕을 정신과 환자로 둔갑시킨, 임상심리의라는 자신의 신분을 최대한 이용한 이 ‘진단’(?)은, 어떻게 보면, 김기덕 영화보다도 더 폭력적이다. 비평이라는 이름하에. 너무도 위선적이고 비정직한 비평이었다”는 것이다.
위 글은 심영섭이 쓴 <섬>이라는 비평의 전체적인 맥락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은, 전형적으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단 한 단락만을 이용하여 돌팔매질을 하는, 파울 플레이 메타 비평이다. 강성률씨. 원고지 40매짜리 <섬>에 관한 비평을 다시 읽어보라. <섬>에 관한 비평이 ‘ 김기덕은 정신병자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쓴 글인가. 그것이 이 비평의 핵심인가. <섬>이란 글의 핵심은 1. 여성=자연과 동일시하는 김기덕의 화법이 가진 진부함. 2. <섬>에서 나오는 여성과 남성캐릭터의 일관성, 혹은 내러티브의 일관성이 흔들린다는 점(이유는 무리하게 성폭력 장면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라는 점) 3. 김기덕 감독의 에너지가 증오라는 점, 세 가지였다. 물론 강성률씨가 언급한 마지막 말은 말은 ‘왜 그가 증오로 <섬>을 만들었을까?’에 대한 하나의 개인적인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강성률씨의 이러한 비판은 페미니즘 비평이 누구를 인신공격하거나 <섬> 같은 영화에 창녀가 몇명이나 나오나 세어보는 그런 식의 그런 비평은 아닌가 하는 대중의 오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다. 페미니즘 비평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도 감독이 ‘무엇’을 다루느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가 수간을 다루느냐 그가 창녀를 다루느냐 그가 회 뜨는 칼로 사람을 찌르느냐를 가지고 문제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땅히 비평의 본분은 바로 ‘WHAT’에 있는 것이 아니라, ‘HOW’에 있다. 그리고 페미니즘 비평의 본분은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 숨겨져 있는 여성에 대한 억압의 기제 그 ‘HOW’를 밝혀내는 데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섬>에서 나는 김기덕 감독이 정신병자임을 입증하고 싶거나, ‘중오’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느냐에 대해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왜 그 증오를 하필 ‘여성에게 투사하느냐’를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가능한 하나의 가설로 혹 그가 정말 어떤 복수 충동이 있나 생각해본 것이다(김기덕 감독은 최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더이상 “증오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뒤집어보면 이 선언은 과거에는 증오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시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증오를 여성에게 투사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사회비판 속에 한 남자의 사랑과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감추어버리는 일.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은 최근 <사마리아>의 연출변에서 해탈하고 싶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정말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가 막 증오에서 해탈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갑자기 롱테이크 롱숏의 대가인 것처럼 보일 때부터, 사람들은 그의 영화에 앞다투어 상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김기덕의 영화는 앞다투어 흥행에 실패하고 있다. 본인은 해탈하고 싶어하는데 관객은 감독이 해탈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일. 그게 바로 지금 당면한 김기덕의 딜레마 아닌가.
페미니즘 비평이 불공평한가강성률씨의 메타 비평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강성률씨은 심영섭에 대해 <씨네21>을 자신의 비평지처럼 여긴다는 둥, 누구보다도 다혈질이라고 소문이 났으며, 논쟁에서는 예의를 따지지 않는 심영섭이 왜 백상빈의 반론에 재반론을 하지 않고 자신의 평론집에 <섬>에 관한 글을 실었는가 하고 따진다. 어떤 의견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 것이 곧 그 의견을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백상빈씨의 글에 대한 반론을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 글은 심영섭에 대한 정신분석이지 심영섭의 <섬>에 대한 메타 비평은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걱정이 슬금슬금 된다. 독자들이 정말 심영섭을 다혈질의 예의없는 여자로 알면 어쩌나. 그리곤 화도 난다. 대체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에 대해 소문에 근거해서 부정적인 뉘앙스로 그의 성격을 못을 콱 박듯이 사실로 만들어버리는 강성률씨의 어투는 또한 예의가 있는 행동인가?
이제 강성률씨는 심영섭이나 주유신에 대한 의견을 떠나 페미니즘 영화비평에 대한 의문점이라는 제하에 ‘오직 하나의 잣대로만 비평을 하는 페미니즘 영화비평이 최고의 비평이라고 우긴다면 파시스트적 페미니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페미니즘 평론가들이 말하는 주체적 여성이 뭔지를 모르겠으며 페미니즘 영화평론가들이 불공정하다며 이런저런 사례를 늘어놓는다. 예를 들면 “<피아노>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성 주인공의 손가락을 잔혹하게 자르는데,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남성 감독들이 불륜의 대가로 남편이 부인의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을 묘사했더라면 강하게 비판할 것”이라는 거다. 이런. 이 단락이야말로 강성률씨, 그가 얼마나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머리로 이해했는지를 드러내는 하나의 극명한 증거일 것이다. 강성률씨가 예를 든 <피아노>는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동일한 행위도 역사적 시대적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설마설마 강성률씨가 이것도 모를까.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결혼한 아내를 남편의 부속물이라고 생각하였다. 제인 캠피온은 이러한 생각이 여성에게 인간에게 얼마나 폭압적인가를 드러내는 장치로 에이다의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었을 게다.
또한 강성률씨는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가 철없는 외손자에게 모멸당하고 고통을 겪더라도 참아야 하는 외할머니의 인고의 삶을 다룬, 지극히 반페미니즘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면서 페미니즘 평자들은 왜 아무런 문제제기도 않고 극찬 일색으로 갔는가, 혹 이정향 감독이 여성 감독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대체 어떤 평론가가 어떤 잡지에서 <집으로…>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극찬했는가? 강성률씨의 주장대로라면 페미니즘 비평가들이 임순례 감독(시종일관 여성이 아닌 남성들을 소재로 해서 영화를 만드는)을 지지하는 것도 그녀가 여성 감독이기 때문이라는 것인가 뭔가. 주체적 여성에 대한 정의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강성률씨가 페미니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무지막지하게 추상적이라고 보여진다. 누군가 영화평론가가 <집으로…>를 지지한다면 그것은 <집으로…>가 페미니즘이냐 반페미니즘이냐 하는 차원을 넘어선 다른 이야기, 우리가 어렸을 때 느끼고 혹은 바랐던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을 그러나 이제는 찾을 수 없는 욕망을 할머니의 품속에서 찾게 하는데 감동받았기 때문은 아닐까? 모든 것을 덮어주고 항상 내편이 되는 사람을 찾은 듯싶은 기쁨, 어떤 원형적인 힘이 관객을 끌어모은 것은 아니냔 말이다. 그게 왜 재미없게 페미니즘의 잣대로 논의되어져야 하는가. 답답하게도 세상 모든 영화를 페미니즘이냐 아니냐의 차원에서 보는 사람은 바로 이 친구, 강성률씨 아닌가.
페미니즘 평론 : 이분법을 넘어보려는 노력그러니 진심으로 제안하는 바이다. 강성률씨 제발 대학원으로 돌아가서 페미니즘 이론 공부를 제대로 하기 바란다. 또는 여장을 하고 위장취업을 해서라도 여성이 당하는 고통을 좀 느껴보고, 메타 비평을 쓰기를 권유한다(농담입니다. 그의 글쓰기 행태로 보아서 이런 제안을 하면 정말 여장을 하고 위장취업을 할까 걱정이 됩니다). 그는 어이없게도 무려 한 페이지 넘게 “필자가 페미니즘 평론가라면 <취화선>도 혹평하고 <오아시스>의 강간에 대해 지적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영화들을 페미니즘의 잣대로 다 혹평하란다. 나는 <오아시스>의 여주인공이 자신을 강간하려 했던 남자에게 전화한다는 것이 반페미니즘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여자를 성폭행하면 반페미니즘이고 여자에게 극진하게 잘해주면 페미니즘인가? <오아시스>의 문소리는 고립된 섬 같은 존재이다. 이창동 감독이 이야기하려 했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인간과 소통하고 싶었는가 그 간절성에 대한 어떤 극단적인 예였을 것이다. 강성률씨에게 미안하게도 나는 <오아시스>를 보면서 페미니즘의 ‘페’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더 어이없게도 “김기덕 영화는 화면에서 직접적으로 다 말해주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지만, 다른 감독의 영화에는 그것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 필자는 이 말에 하나도 동의할 수 없다. 김기덕의 <나쁜 남자>와 <사마리아> 역시 남자들의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면서, 남성들의 시선이 숨겨져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나쁜 남자>의 시선의 문제에 대해서는 <씨네21>에 수록된 <나쁜 남자> 비평을 읽어달라). <사마리아>의 경우, 주인공들이 마치 여고생들, 기꺼이 매춘을 하고 서로간의 우정으로 서로를 구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다. 정성일 선생님이 <한겨레>에 쓴 바와 같이 사실상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여진이 아니라 여진의 아버지이다. 여성을 구원의 대상으로 보는 이 영화는 여고생을 기쁨주고 행복주는 창녀 바수밀다라고 이상화시킨다. 그러나 여진의 죄를 사해주는 것도 여전히 남성인 그녀의 아빠, 가부장일 뿐이다. 오직 남성의 욕망과 시선으로 포화된 <사마리아>를 보며, 헤벌쭉 웃는 여고생의 브래지어를 맨손으로 끄집어내리는 포스터를 보며 내가 생각한 것은 이것이다. 젠장. 이제는 여고생까지 구원의 대상이 되어야 하나?
강성률씨는 결론적으로 페미니즘 이론이 공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기덕 감독의 비판은 마녀사냥이라면서 말이다. 그가 이 글을 쓰고 싶었던 것도 결국 이 불공성에 대해 심히 분노했기 때문인가보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심각한 질문을 던져보자. 다른 건 몰라도 강성률씨 이 질문만은 기억하시길 빈다. 대체 비평은 공정해야 하는가? 혹은 비평이 공정할 수 있나? 세상은 불공평한데 페미니즘 비평만 공평해야 하나. 혹은 앞으로 페미니즘 평론가들은 강성률씨가 생각하는 대로의 페미니즘 비평을 해야 하는 가? 비평은 심사가 아니다. 심영섭이 백상영화상 심사위원일 때는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해서나 <사마리아>나 <미소>에 대해서 공정하게 심사해야 하지만 비평가 심영섭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대해 왜 공정하게 비평해야 하는가? 분명히 페미니즘 비평은 영화 속에 깃든 여성들의 시선을 주장하고, 그 시선이 담긴 영화를 옹호한다. 마치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 때 자신의 세계관을 옹호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뭐 김기덕의 비평이 마녀사냥이라고? 내가 보기에 김기덕 그는 마녀사냥을 당하기는커녕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행복한 감독이다. 대한민국 감독 중 살아생전 영화를 만들면서 누가 그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는가.
결국 강성률씨는 심영섭은 자신을 “페미니즘 평론을 하지만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한다면서 ‘김기덕의 저격수’라고 자처하는 그녀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면서 왜 페미니즘 평론을 하는가? 라며 <섬>의 메타 비평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로 자신의 비평의 끝을 맺고 있다. 강성률이란 검사의 구형과 논점은 이렇게 허망하였다. 그는 배심원에게 강도 짓이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열나게 이야기하다 갑자기 피고는 강도인가 아닌가 자백하라고 다그친다.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 지금처럼 장르가 보이면 장르로 가고, 여성이 보이면 페미니즘으로 가고, 감독이 보이면 작가주의로 가는 것뿐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공공연하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하는 까닭은 페미니즘을 강성률씨, 당신처럼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내게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론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나의 삶이다. 나는 학교에서 여성주의나 영화에 관한 수업을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 반여성주의는 김기덕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삶의 전 역사에, 나를 길러준 전 가족 안에, 지금도 이 사회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여성으로 나는 피해 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해 경험이 있다. 나의 페미니즘은 바로 그런 삶 속에서 태동한 것이다. 부잣집 아들이 공산주의에 반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강성률씨 혹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너는 페미니스트냐 아니냐 실토하라는 그 이분법적인 사고가 정말 가부장적이라는 것을. 모든 비평은 공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생각이 예술과 비평의 다원성에 대한 일종의 강간이라는 것을. 페미니즘 평론은 바로 그 이분법적인 세계관,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는 금을 넘어보자는 절절한 몸부림이다. 재미있는 것은 페미니즘을 건드리는 어떤 지식인도 당신처럼 자신을 안티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길 꺼린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어줍은 삼류 평론가에 대한 최후 변론의 최종 논고를 할 차례인 것 같다. “여러분. 페미니즘은 좋은데 페미니스트들은 싫으십니까? 공산주의는 좋은데 공산주의자는 싫으십니까?” 이 질문에 응답을 해야 하는 사람은 이제 강성률씨, 당신의 차례이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