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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3인 3색 [1] - 페미니즘 비평 방법론을 쇄신하라

<나쁜 남자>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극히 우연이었다.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경북 안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그 지방의 정서가 부담스러웠다. 아들이라고, 그것도 장남이라고, 상대적으로 ‘대접’받는 것이 편지 않았다. 결국에는 그것이 장남의 책임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이 ‘불편’했고, 차남이나 누이들은 그것을 ‘불평’했다. 비겁하게도 나는 제대 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것을 면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은 가족주의의 해체였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완고한 가족주의에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것을 깨면 모든 문제는 자동적으로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자료를 뒤지던 나는 여러 ‘동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부류가 바로 페미니스트였다. 그들은 ‘여성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여성으로 길들여지는’ 가족주의를 깨려고 하고 있었다. 입장은 달랐지만 목적은 같았던 것이다.

영화를 공부하면서 페미니즘을 다시 접한 것은 김기덕의 영향력이 컸다. 다시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김기덕 영화가 지니고 있는 장점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마다 편차가 있고, 나의 기호도 있지만, 질기고도 질긴 욕망의 집착, 그 끝을 보려는 결연한 자세, 인간의 관계를 착취와 피착취의 구조로 파고드는 내용, 그런 내용을 독특한 미장센과 편집으로 연결시키는 스타일이, 적어도 이제까지 보아온 한국영화와는 전혀 다른 영화였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그는 저예산으로 전쟁하듯이 영화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작품마다 진검승부를 하고 있었다.

김기덕 영화보다 더 폭력적인 비평

그런데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김기덕의 영화를 두고 너무도 극단적인 어조로 비난하고 있었다. 페미니즘 내공이 깊다고 정평나 있는 주유신은 <나쁜 남자>를 두고 “이 영화는 한마디로 여성에 대해 어떤 성찰도 없는, 한 남성의 무책임한 사회적 배설 행위일 뿐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이런 영화가 존재하고 소통된다는 사실 자체가 여성에 대한 위협이고 어떤 이유에서든 이 영화를 지지하는 행위는 여성들에 대한 모욕일 뿐”이라고 하면서, 별점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주유신, ‘나쁜 영화다’, <동아일보> 2002년 1월11일 8면). 나는 이 비평을 읽을 때마다 어떤 섬뜩함을 느낀다. 이게 과연 비평인지 선언문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이런 비평이 영화비평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생각하기도 한다. 주유신의 이 글은 반론의 가능성을 모두 닫아놓고 있는, 극단적인 이분법에 근거한 흑백논리일 뿐이다. 주유신에 의하면, 이 영화를 보거나 지지한 사람은 여성을 혐오하거나 위협한 게 되어, 졸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여성 혐오증자가 되어버렸다. 주유신의 진정은 알겠지만, 이런 식의 비평은 정말 곤란하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심영섭의 비평이었다. 그는 <>을 두고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의 욕망은, 동물적이라기보다 짐승적이라기보다 사랑받지 못하고 보살핌이 무언지조차 모르는 정신과 환자의 비극적인 복수 충동에 가깝게 보인다”고 말했다(심영섭, ‘바다로 나아가지 못하는 악어’, <씨네21> 251호, 70쪽). 그런데 바로 앞부분에 “감독의 증오인지, 주인공들의 증오인지는 모르겠으나”라는 말을 슬쩍 집어넣고 결말에는 “치유”를 거론하면서, 감독 김기덕을 정신과 환자로 둔갑시켜버렸다. 임상심리의라는 자신의 신분을 최대한 이용한 이 ‘진단’(?)은, 어떻게 보면, 김기덕 영화보다도 더 폭력적이다. 적어도 김기덕 영화는 그렇게 교묘하게 위장하지는 않는다. 심영섭은 교묘하게 문제를 희석시키면서 자신의 권위에 의지해서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매도해버렸다. 그것도 비평이라는 이름하에. 너무도 위선적이고 비정직한 비평이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심영섭의 이런 주장에 대해 정신과 의사 백상빈이 곧 반론을 게재했다. 심영섭이 “주인공들을 ‘정신과 환자’라고 정신병리적으로 비판하며 슬며시 그것을 감독의 문제와 등치시켜 김 감독 개인의 병리에 대해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예리한 지적이었다(백상빈, ‘섬에 머무르는 악어, 그 섬에 가고 싶다’, <씨네21> 253호, 73쪽). 당연히 재반론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재반론은 없었다. <씨네21>을 자신의 비평지처럼 여기는 심영섭이, 누구보다도 다혈질이(라고 소문나 있)고 논쟁에서는 예의를 따지지 않는 심영섭이 재반론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반론을 수긍한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 내용을 가감없이 그대로 단행본에 게재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백상빈의 반론에 이은 자신의 재반론을 써서 함께 게재하든가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그 글만이라도 단행본에서 빼는 것이, 단행본을 돈주고 사서 읽을 독자에 대한, 평론가의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

페미니즘의 시선은 확장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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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으로 김기덕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김기덕 영화가 지니고 있는 여성 폄하적 내용에는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것이 약육강식의 사회를 다루는 김기덕만의 독특한 방식이고, 착취와 피착취의 구조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게 다루는 방식이 편할 리 없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김기덕 영화가 지금처럼 융단폭격을 받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단점 못지않게 장점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오직 하나의 잣대로만 김기덕 영화를 혹평한다. 김기덕 영화의 다른 것은 아예 보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페미니즘’ 영화비평을 하고 있을 따름이지, 영화비평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페미니즘 영화비평은 영화비평의 한 방법일 뿐이다. 그것은 절대적 가치를 지닌 방법론도 아니다. 단지 많은 방법론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만약 페미니즘 영화비평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 비평방법이라고 우긴다면, 그것은 그들이 그렇게 경멸하는 ‘파시스트적 페미니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페미니즘 비평가들이 김기덕 영화를 논하면서 혹평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영화에는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지 않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본다는 것이다. 나도 그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그런 부분이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 나는 그것보다 더 원론적인 것이 궁금하다. 페미니즘 비평가들이 말하는 주체적인 여성이란 무엇이며, 그런 여성이 그려진 영화는 어떤 영화인지, 그리고 한국에서 김기덕을 제외한 다른 감독들의 영화에는 여성들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그 영화에 대한 페미니즘 평론가들의 비평은 어떤지 궁금하다.

먼저 영화 속에 그려진 주체적인 여성은 어떤 여성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른바 페미니즘 계열의 걸작들을 봐도 나는 아리송하기만 하다. 페미니즘 평론가들은 여성의 주체성이 살아 있는 영화를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부장적 시선으로 그려지는 여성이나, 남성의 욕망이 만들어낸 수동적 여성의 욕망이 아니라 여성의 능동적 욕망, 즉 여성의 숨결이 살아 있는 영화를 말한다. 더 나아가 여성영화(Women’s Film)란 가부장적인 관습적 영화 형식을 깨고 여성을 진정한 주체로 그리는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말한다. 때문에 여기서 더 나아가 여성의 시각으로 영화 보기를 제안하기도 한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다. 남성 지배를 벗어나 여성의 욕망을 진솔한 여성의 시각으로 제대로 그리는 영화는 절실하게 필요하다. 그런데 조금 더 들어가보자.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영화형식을 깨고 살아 있는 주체적 여성을 그린 영화란 도대체 어떤 영화인가? 정의가 너무 추상적이며, 그것을 그렸다는 영화들도 손에 와 닿지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어느 날 배창호 감독의 에세이를 읽다가 공감한 부분이 있다. 그는 대표적인 페미니즘영화로 인정받는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를 보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이 영화의 뛰어난 영상적 표현력과 섬세한 심리묘사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못마땅한 장면이 몇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남편이 주인공의 불륜을 목격하고 그녀의 손가락을 자르는 잔혹한 장면과 피아노 연주 대가로 거래처럼 이뤄지다가 점점 진하게 전개되는 에로틱한 장면 등이다. 만약 남성 감독들이 불륜의 대가로 남편이 부인의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을 묘사했더라면 강하게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장면을 여성이 연출했으니 그것은 남성에게 잔혹하게 학대받는 여성의 상황을 극명하게 묘사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성적인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남성 감독이 이 장면을 그대로 연출했다면 성의 도구로서의 여성이 되는 것이나 여성 감독이 그려냈으니 그것은 여성의 성 심리의 표현이라고 말한다.(배창호, <창호야 인나 그만 인나: 배창호 감독의 영화 이야기>, 여백미디어 펴냄, 2003, 216쪽)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이 말이 굉장히 깊이 와 닿았다. <피아노>에 나타난 여성의 섬세한 감정과 흐름을 인정하지만, 이 영화가 페니미즘의 대표작으로 꼽힐 만큼 페미니즘 입장에 충실한가 하는 것은 나에게 의문이었다. 만약 이 영화를 남성이 만들었다면 어떻게 평가했을 것인가? 물론 여성이 만들었기 때문에 여성의 섬세한 감정이 살아 있고 여성을 주체적으로 그릴 확률이 높지만, 그렇다고 모든 여성 감독의 영화가 페미니즘영화는 아니다. 비록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관습화된 남성 중심적 영화에 물들지 않은 이들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형식으로까지 승화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으로 봤을 때, 페미니즘 평론가들이 극찬한 <집으로…>가 페미니즘 입장의 영화라고 볼 필요도 없다. 오히려 나는 철없는 외손자에게 모멸당하고 고통을 겪더라도 참아야 하는 외할머니의 인고의 삶을 다룬, 지극히 반페미니즘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이문열의 <선택>과 그리 다르지 않은 영화이다. 그런데 페미니즘 평자들은 왜 아무런 문제제기도 않고 극찬 일색으로 갔을까? 아마도 이정향 감독이 여성 감독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같은 내용으로 남성 감독이 연출했다면 그런 평가를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학문, 윤리,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

<오아시스>

두 번째 질문의 답은 쉽다. 김기덕을 제외한 다른 남성 감독의 영화에 그려진 여성 역시 대개는 비주체적이고 성적 대상으로 그려진다. 이재용을 비롯한 극소수의 남성 감독을 제외하면 대개의 영화 속 여성은 비주체적으로 그려진다. 페미니즘 평자들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다른 감독의 영화는 김기덕처럼 혹독하게 비평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그리는 홍상수의 영화에 대한 그들의 평은 어떠했는가? 만약 필자가 페미니즘 평론가라면 임권택의 <취화선>을 혹평했을 것이다. 이창동의 <오아시스>도 혹평했을 것이다. 농담조로 한 친구는 나에게 <취화선>을 ‘노는 남자 창’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영화의 여성은 장승업의 들러리일 뿐이다. 강간하려 한 남자에게 먼저 전화해 엉뚱한 얘기를 하는 <오아시스>는 논할 필요도 없겠다. 김기덕에게 들이대던 그 신랄한 칼날을 왜 이들에게는 들이대지 못하는가, 아니면 들이대지 않는 것인가?

혹 이들의 영화 속 여성 폄하는 김기덕 영화보다 덜하거나 간접적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김기덕 영화보다 오히려 이들의 영화에 더 비판적이어야 한다. 김기덕 영화는 화면에서 직접적으로 다 말해주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지만, 다른 감독의 영화에는 그것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즉, 간접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일반 관객도 아니고 명색이 영화평론가라면 마땅히 그런 작업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페미니즘은 학문적 입장이면서 윤리적 입장이고 동시에 실천적 입장이기도 하다. 때문에 페미니즘 영화비평 역시 이런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인간해방을 목표로 한다. 차별을 넘어 서로 존중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페미니즘 비평을 보면 그런 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무엇보다 페미니즘 비평은 공정해야 한다. 김기덕에게만 집중 공격하고 다른 감독은 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그것은 ‘마녀사냥’에 불과하다. 또 하나의 차별인 것이다.

페미니즘 평론가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 심영섭은 자신을 “페미니즘 평론을 하지만 페미니스트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페미니즘 시각으로 ‘김기덕의 저격수’라고 자처한다. 지금 심영섭은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인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면서 왜 페미니즘 평론을 하는가? 운동은 열심히 하는데, 정작 자신은 운동권이 아니라고 한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페미니즘 비평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온몸을 바쳐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분들을 욕보여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주유신의 비평은 일정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과격한 페미니스트 주유신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밖에 평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다만 그 역시 공정성과 평가 기준에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나는 안티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한국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이 지금보다 훨씬 융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뿌리깊게 내려앉은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숨막힐 정도로 사회 구석구석에 가부장적 수직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한국사회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가부장적 수직구조에 있는데, 그것을 깨려면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이 큰힘을 발휘해야 한다.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단호히 거부하고 평등의 세상으로 나가는 전초를 페미니즘이 열 수도 있다. 그런 세상을 바라면서, 지금의 경직된 페미니즘 영화비평을 돌아보자는 의미에서 이 글을 썼다.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작업이었지만, 좀더 생산적인 비평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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