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으로 가득 찬 자본가가 만들어낸 상상을 초월하는 테크놀로지, 그것이 야기한 부작용을 바로잡기 위해 예측 불가능한 위험이 혼재하는 ‘테마 파크’ 속으로 뛰어드는 젊은 전문가 무리들. 이쯤 되면 여기서 <쥬라기 공원>과의 묘한 데자뷔 현상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좋은 의미에서든 그 반대의 의미에서든, 이 영화는 마이클 크라이튼 소설의 컨벤션과 클리셰를 모두 지니고 있는 작품이고 그것들은 잘 만들어졌을 때 ‘상업영화의 미덕’이 된다.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마크 트웨인의 <아더왕과 양키>의 방식으로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 속에 삽입해 넣고 거기에 젊은 고고학자들의 모험과 야심에 찬 자본가의 음모까지 버무려 넣은 원전은 다채롭다. 크라이튼의 원작을 열심히 따라가기만 해도 속이 알찬 상업영화 한편은 거뜬히 뽑혀나올 듯싶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시작되면, 백년전쟁의 한가운데 갑자기 떨어진 주인공들은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백년전쟁’의 중세 전투가 ‘공룡떼’의 스펙터클을 보여주기 힘들 터. 허술한 내러티브의 결점을 시각적 쾌감으로 보완하려는 것은 애초에 힘에 부치는 일이 아니었을까. 캐릭터들을 ‘매력없는 방식으로’ 낭비하고, 중세 전쟁신의 스펙터클에 사활을 건 방식은 그래서 문제다. 창공을 가로지르는 불화살을 지켜보는 소박한(!) 즐거움도 나쁘진 않지만, 별다른 이유없이 죽어나가거나 머리가 비어 있는 게임 캐릭터처럼 고민없이 행동하는 주인공들을 지켜볼 때마다 ‘왜?’라고 끊임없이 반문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난처한 일이다.
텅 빈 스펙터클에서 길을 잃다, <타임라인>
글
김도훈
2004-02-25
>‘마이클 크라이튼’의 중세로 떨어진 젊은 고고학자들, 텅빈 스펙터클에서 길을 잃다
프랑스의 라로크성 유적에서 발굴 작업에 한창이던 일단의 젊은 고고학자들이 600년 이상 숨겨져 있던 지하유적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발견된 것은 며칠 전에 뉴멕시코로 떠난 존스턴 교수의 600년 동안 봉인되어온 친필 구조요청과 안경알이었다. 이 앞뒤가 맞지 않는 기이한 사건의 진위를 알아내기 위해 유적 발굴의 후원자였던 ITC에 연락을 취한 그들이 알아낸 것은, 사물의 전송이 가능한 양자 원격 이동 장치가 존재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1357년의 프랑스로 떠났던 존스턴 교수가 행방불명됐다는 사실이었다. 4명의 젊은이들은 이제 ‘6시간’ 안에 교수를 구출하여 현재로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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