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95%쯤? 거의 다 찍었어요. 아예 오늘 보여드릴까?”
모니터에 떠오른 타임라인 위로 장진 감독이 마우스를 긋자, <아는 여자>의 현장편집본이 조그만 윈도 안을 휙휙 스쳐간다. 그날그날 꽤 세세한 부분까지 편집을 해온 장진 감독이 가늠하는 A프린트의 길이는 134분. 남은 5%는 오늘 주인공들이 관람하는 영화 속 영화 <혈통 깊은 전봇대>의 4분 분량이다. 짤막하지만 <그녀에게>와 <미술관 옆 동물원> 속 작은 영화들이 그랬듯, <아는 여자> 전편에 숨어 흐르는 사랑에 관한 판타지를 함축한 그림액자 같은 대목이 될 것이다.
월요일 밤. 분당의 한 멀티플렉스에 들어서는 50여명의 관객 중에 “대체 같이 왜 왔을까?” 싶은 데면데면한 커플이 있으니 바로 <아는 여자>의 주인공 동치성(정재영)과 한이연(이나영)이다. 야구선수 동치성은 최근 애인에게 버림받은데다 3개월밖에 못 산다는 벼락통고를 받았다. 사랑이 뭔지, 사는 게 뭔지 자포자기해서 동네 술집을 찾아 인사불성이 된 치성은 바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이연의 보살핌을 받고 그 빚 때문에 급기야 극장까지 왔다. 하지만, 이연에게 치성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라 너무 늦게 성사된 필연일 뿐이다. 이웃에 이사온 까까머리 치성이 떡을 들고 온 아득한 어느 날부터 이연은 골목을 도는 치성의 발소리에 남몰래 귀기울여왔다. 하지만 오늘 치성의 기분은 엉망이다. 하필 헤어진 여자친구(오승현)를 극장 로비에서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누구야? 만나는 사람이야?” 묻는 그녀에게 치성은 얼버무렸다. “어, 아는 여자야.” 오늘 밤 촬영은 객석에 앉은 이연의 소극적인 추궁부터 시작한다. “주변에, 아는 여자 많아요?” “거기가 처음이에요.” 말간 물 같은 이연의 얼굴 위에 행복감이 꽃가루처럼 번져나간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시작된 작업이지만 야행성인 장진 감독의 목소리는 팽팽하다. 촬영과 현장편집은 기본이고 배우, 스탭과 상의하고 주변에 농담까지 골고루 분배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에서 고속으로 돌아가는 중앙처리장치의 기계음이 들릴 것만 같다. 확실히 장진 감독은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전에는 대놓고 승부수를 거는 위험한 코미디를 했지만 이번에는 왠지 그렇게 쓰고 싶지 않았다. 코미디 감독은 소재를 바꿔도 새로운 느낌을 주기 어렵다. 뭔가 자신이 발명해내는 수밖에 없다. 어서 도마에 올라 네 번째 작품으로 좋은 선택이었는지, 바뀐 내 웃음의 색깔이 전달되는지 확인하고 싶다.” 그의 들끓는 궁금증이 풀리게 될 <아는 여자>의 개봉예정일은 6월4일이다.
사진 오계옥 · 글 김혜리
△ 촬영이 이루어진 극장 스크린에는 <말죽거리 잔혹사>와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 소리없이 돌아갔다. 완성된 영화에서는 큰 스크린 앞에 세워놓은 작은 스크린에 <혈통 깊은 전봇대>가 덧씌워질 것이다. (왼쪽 사진)
△ 장진 감독을 ‘너무 많이 아는 남자’ 정재영. 금연인 극장 밖으로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온 정재영을 장진 감독이 “실미도 갔다오더니 주먹 쓰는 신 아니면 신경도 안 쓴다”고 놀린다. (오른쪽 사진)
△ 치성에게 질문을 던진 뒤 너무 빨리 고개를 돌렸다는 감독의 지적에 “답이 나올까봐 겁나서 빨리 돌릴 수도 있죠”라고 총명한 반론을 제기하는 이나영. 기자도 내심 동조하며 눈치를 봤으나 역시 감독의 권력은 셌다. (왼쪽 사진)
△ 콘티를 그리지 않는 장진 감독은 “스토리보드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해당 신에서 핵심이 되는 감정을 짚고 그 감정에 관객을 주목시키기 위해 필요한 카메라의 위치와 동선을 촬영감독과 현장에서 상의하는 스타일이다. (오른쪽 사진)
△ 이나영은 “여자 캐릭터에 자신이 없어 차라리 전쟁영화를 찍고 싶다”는 장진 감독이 최초로 길게 호흡을 맞추는 여배우. <네 멋대로 해라>의 전경을, 그리고 이나영 본인을 많이 닮았다는 이연이지만 성실한 이나영은 그 때문에 더 걱정이 많아 보였다. (왼쪽 사진)
△ 극장신을 마치고 촬영에 들어간 로비에서 옛 애인을 만나는 신. 새벽 5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오른쪽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