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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 세대의 교실이데아, <말죽거리 잔혹사>

<말죽거리 잔혹사>, 시인 유하에서 감독 유하로

“시는 변방으로 귀양가버린 노래, 그리고 그 변방 중의 변방에 있는/ 나의 말을 나는 사랑한다.” 가장 최근 시집에 피력된 시인 유하의 뼈저린 자기 긍정이다. 그러던 그가, 변방 중의 변방인 한국 시로부터 중심 중의 중심을 욕망하는 한국영화로 한눈을 팔았다. 그것도 남의 소설을 밑천으로 모든 기혼자를 미치광이 삼으며. 나름대로 성공한 재기작이었던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하지만 90년대 문학을 쇄신한 그의 시에 비하면 범작이었다. 그는 10년 만에 돌아온 영화계의 탕아가 아니라, 잠시 변방에서 외도한 가출 시인이었다. 한데 가속도 붙은 차기작 <말죽거리 잔혹사>는 가출이 출가가 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전한다. “온갖 현란한 이미지들 밖에서 서성이는 시가/ 언젠가는 다시 카니발의 아침을 열리라” 장담하던 시인 자신이 이미지의 카니발을 열려 한다. 유하는 제2의 이창동이 되려는 걸까? 이건 영화팬에겐 축복이지만, 시인 유하의 팬에겐 ‘배신이야 배신’이다.

청춘이 부닥친 벽과 분루를 거의 최초로 되살려내다

하지만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의 시에 트라우마처럼 조각나 있던 ‘세운상가 키드’의 자화상을 복구한 유하만의 영화다. 그는 어쩜 이 영화를 찍으려고 청춘을 보냈을지 모른다. 시인의 이 전사(前史)는 고로 그의 시를 배신하는 게 아니라 배태하는 영화다. 어찌 보면 뒤늦게 도래한, 이미 나왔어야 할 영화. 이런 시차는 <정무문>의 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가 ‘이소룡 세대에 바치는’ 영화라는 점에서도 반복된다. 유하 세대는 한국의 첫 대중문화 세대지만, 이 세대성은 신세대와 N세대가 한바탕 스크린을 휩쓴 뒤에야 영화화된 셈이다. 최근 한국영화의 과거 소환 경향에 비춰보면, 이 뒤늦은 부활은 억압된 것의 회귀와도 통한다. 가령 압구정동 오렌지한테 대중문화는 억압과 무관했고, 유하 역시 키치의 분방함으로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를 찍은 바 있다. 그러나 유신체제로 멍든 70년대의 대중문화는 등록 거부된 해적판들로 존재하기 일쑤였다. 대중문화 자체가 체제와 전선을 긋는 마당이니, 가장 폭압적인 제도에 속한 고등학생에겐 삼류극장의 액션스타가 해방의 영웅인 게 당연했다. 70년대 ‘고딩’ 대중문화 세대는 80년대 ‘대딩’ 386세대보다 훨씬 순수하지만 무력한 문화적 방식으로, 반체제의 전투력을 배양했던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래서 적잖은 유머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정공법으로 시대와 마주한다. 연배상 386이지만, 유하는 80년대에 착목한 386감독들과 다르게, 그 이전의 청춘이 부닥친 세상의 벽과 그 앞에서의 분루를 거의 최초로 되살려낸다.

<바람부는…>의 한 대사는 여기서 꽤 시사적이다. 감독의 분신인 주인공 시인은 말한다. “미친 세상에 살려면 미친 세상보다 더 미친 광인이 되거나, 미친 세상과 무관한, 사랑을 구걸하는 거지가 되거나.” <바람부는…>의 시인은 오렌지족이 내다버린 순정을 지닌 거지가 되려 했다. 포스트모던 풍자시를 난사하긴 했어도 유하의 시적 고향은 ‘하나대’로 불린 서정적 전원이었듯, 그의 마음 바탕은 여성성으로 가득하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도 순정파 서정시인이었다. 꽃 장식한 라디오 엽서로 <원 서머 나잇>의 ‘필링’을 전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위해 통기타를 연습하는 대중문화 세대. 그러나 학교는 낭만을 불허했다. 교장 차 뒤꽁무니에 ‘충성’을 외치는 그곳은 법의 이름으로 폭력이 하달되는 저질 군대와 다름없다. 선생은 학생을 패고, 선배는 후배를 패고, 부모는 자식을 팬다. 동급생간에도 위계가 있다. 권력을 위임받은 깡패인 선도부는 학생들의 반감을 무력으로 앙갚음하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선도부와 맞장뜬 뒤 자퇴하는 현수 뒤로는 ‘유신 교육의 심화’라는 학교 간판이 선명하게 잡힌다. 개발붐에 들어선 강남의 비리 사립고는, 근대화 빼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군부독제체제의 미친 세상에 대한 알레고리로 폭발한다.

사랑이 불가능한 이 미친 세상은 그보다 더한 광기로만 견뎌진다. 타락한 방식으로 타락한 세상에 맞서기. 도색잡지 팔기와 ‘짤짤이’와 ‘삥듣기’에 골몰하는 것도 공부만이 합법인 체제를 벗어나려는 탈법의 몸부림들이다. 그 타락의 영토에선 성적순 대신 주먹순으로 자치권이 행사된다. 남성성이 위계화된 거기선 여자 앞에서 자해하며 사랑을 맹세하는 깡다구가 섬세한 진심보다 더 남자답고 멋진 섹스어필이다. 그러나 마초들의 무법지대 역시 군사문화의 왜곡된 하위체제일 뿐이다. 현수는 사랑을 재고품처럼 처분하려는 우식에게 처음으로 주먹을 날린다.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 자체의 구원을 위해, 그는 누구보다도 더 타락할 수밖에 없다. 그 광기의 도화선이 이소룡의 절권도다. 오직 이기기 위한 무도라 폄하되긴 해도, 절권도는 기존 무술의 정형성에 대한 해방의 선언이었다. 현수가 실천한 건 결코 법이 되지 않는 폭력의 진정성이었지, 아이들이 ‘똥폼’ 잡는 괴조음 스펙터클이 아니었다. 그래서 옥상 사투는 멋이 아니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처절함으로 베어든다. 법도 의리도 없는 이 개싸움은 우정과 규칙에 입각한 농구시합의 육체적 스펙터클을 그대로 뒤집는다. “쪽팔리면 학교생활 끝”이라던 우식은 쪽팔려서 학교를 떠난 마초일 뿐이다. 아름다운 의리 따윈 없다. 그게 현실이다. 현수는 이 모든 교실이데아의 ‘좆같음’을 일갈한 뒤, 승자의 권력을 버리고 학교를 떠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다.

로컬의 리얼리티, 변방성의 극점

78년의 대중문화는 결국 미친 세상을 잊게 하는 사랑의 묘약이었다가, 그마저 빼앗는 체제에 대한 저항의 거점이 된다. 이런 변화 덕분에 <말죽거리 잔혹사>는 판타지와 현실, 장르문법과 리얼리즘 사이를 줄타기한다. 사실 음악이나 미장센, 인물 배치와 갈등 구조는 관습적인 편이다. 하지만 쿨하게 끊은 편집과 미디엄숏 중심의 근접 촬영으로 거의 학교에 집중함에 따라, 영화는 70년대 한국이 아니면 나오기 힘든 로컬의 리얼리티, 변방성의 극점으로 육박해간다. 그 변방성은 첫사랑의 상실만큼 쓰리고, 쓰림은 제도교육의 현실만큼 현재화된다. 이런 점에서 <말죽거리 잔혹사>보다 정직했던 학원물은 다른 상업장르에서도 드물었다. 정작 70년대 말은 <고교얄개>류의 건전 코미디뿐이었고, 80년대는 3S 열풍에 실린 스포츠만화로 묻혔다. 90년 무렵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등이 이슈였긴 했지만, 제대로 된 도발은 서태지를 기다려야 했다. 90년대 후반부터의 ‘교복영화’들은 장르와 복고 코드를 하나씩 끼고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학교폭력, 삼각관계, 대중문화의 향수 등에서 <여고괴담> <친구> <화산고> <클래식> <품행제로> <해적, 디스코왕 되다> 등과 많이 겹친다. 그러나 이 영화들이 파편적으로 건드린 한국 하이틴의 현실을 <말죽거리 잔혹사>는 코믹액션로망의 장르성으로 버무리면서도, 가장 전형적이고 전면적으로 갈무리한다.

이러한 현실 응시가 좀더 다각도로 투철했다면 싶지만, 감독 유하에겐 리얼리즘 소설가가 아니라 서정시인의 피가 흐른다. 아무리 현실을 정조준해도, 그는 과거가 아니라 “과거라는 고정관념을 추억”한다. 그것은 “낡은 만화책 냄새가 나는” “70년대의 객관적 상관물들”이자, “말죽처럼 짓이겨져 요약된 청춘”이다. 어떤 복고풍 영화보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과거를 되새김질한다. 하지만 <친구>식의 노스탤지어가 현재와 대비되는 ‘한때’의 순수를 장식적으로 만끽한다면,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 과거에서조차 진정한 사랑과 우정은 헛것의 쓰라림으로 어른거렸을 뿐이라 말한다. 과거는 순수의 기원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흔적들이 퇴락한 유행가처럼 순수에의 환멸어린 욕망을 현재화한다고 해야겠다. ‘한때’가 남긴 유한성의 절실함, “그 ‘한때’라는 의미가 모든 종류의 유행가를 구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추하는 복고의 극점에서 복고를 넘어서듯 집요하게 반복된다. 성룡의 세상이 왔어도, 현수의 몸엔 여전히 이소룡의 절실함이 내장돼 있는 것처럼. 고로 유하의 노스탤지어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얻지 못한 ‘한때’의 청춘을 이소룡 세대의 이름으로 호명하려는 시적 욕망에 가깝다. “나는 소멸하는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싶다.” 제도교육이 말소한 그 이름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흔적을 통해 노스탤지어에 현재적 긴장을 불어넣는다.

1인칭 미소년의 마초되기 성장극

물론 한 시대를 갈음하는 영화니만큼 시대적 한계도 뚜렷하다. 대중문화가 재현하는 폭력/사랑의 이분법은 남/녀의 스테레오 타입에 기대고, 속모를 여자는 전형적인 ‘욕망의 모호한 대상’이다. ‘나’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내러티브는 1인칭 미소년의 마초되기 성장극에 머문다. 이건 거의 나르시시즘이다. “너를 향한 내 구애의 말들/ 덧없음이여, 나는 나 이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수는 이소룡을 거울 삼아, 상투적인 몽타주로 자기 육체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공부 아니면 싸움이 인정투쟁의 전부였던 체제에선 여성성에 무지한 수컷들의 자기 강화만이 존재 증명의 길이었으니. 조폭영화와 복고영화는 양아치들의 한풀이성 욕설과 폭력으로 넘쳐날 수밖에 없었던 거다. 하지만 체증 걸렸던 리비도의 폭주도 이제 한 챕터를 넘길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마저 지나치게 손쉬운 재현술이 돼버린 탓이다. 현실은 아직 재현되지 않은 이분법 너머의 영역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한번 정리 안 하곤 못 배겼을 청춘의 몸살에 공감하게 만든 <말죽거리 잔혹사>는 또 나올 게 분명한 유하의 차기작을 기대케 한다. 게다가 그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로 미친 짓에 대한 이분법 탈피를 모색한 바 있다. 장르관습을 넘나들며 새로운 감성으로 한국영화의 영토를 넓히는 일은 유하 감독의 몫이 되기도 했다. 그의 시를 당분간 못 볼지 모르지만, 그의 영화에서 시적 자취를 찾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하다.* 처음과 끝 두 단락 인용문은 유하의 시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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