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러브 액츄얼리>의 로맨스에 열광한 이유
우울증에 빠진 아가씨, “<러브 액츄얼리> 보면 기분 좋아지는데”라는 누군가의 메일을 받고도, 반신반의했다. 자못 진중한 척, 로맨틱코미디의 달짝지근함을 애써 뿌리쳐온 아가씨. 영화 시작하고 고작 10분 뒤 잔뜩 망가진 몰골로 아줌마 박수까지 쳐가며, “진작 볼걸, 진작 볼걸!” 화통 삶아먹은 내 목소리는 관객에게 영화 밖 웃음거리를 제공했다. “‘진작 볼걸’이래, 큭큭.” 웃다 지쳐 숨넘어가며 버둥대다 옆사람 발까지 몇번이나 밟아버린 미안함에, 얼굴을 가린 채 극장을 나왔다. ‘까무러치게 재밌는디. 근디, 워쩌란 말이여.’
<러브 액츄얼리>는 어디에나 넘쳐나는 사랑을 다루지만, 어디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꾐없는 긍정의 어법으로, 사랑을 말한다. 너나없이 자학적이거나 독설적이거나 신경증적인 멜로드라마들. <러브 액츄얼리>에도 물론 불치병이 있고 배신 때리는 남편이 있고 책임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비애가 서린다. 그러나 이들은 청승맞게 매달리거나 시니컬하게 사랑을 조롱하지 않는다. <러브 액츄얼리>는 가질 수 없는 사랑마저 긍정하는 여유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라지게 아름다운 삶에 대한 긍정을 담는다. ‘정 주고 쪽팔림’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사랑을 꿈꾸는 이들. <러브 액츄얼리>에는 숨은 사랑 찾기의 기쁨이 있다. 일면식도 없는 꼬마의 사랑고백을 성사시키려 공항관리자에게 귀여운 사기를 치는 미스터 빈. 죽은 아내는 자신의 장례식을 핑계로 한바탕 축제를 벌여달라 유언한다. 지독한 병마 뒤에도 삶에 대한 사랑을 끊어내지 않는, 죽음을 부여안고 떠나는 자의 붐비는 고독. 타인의 사랑에 대한 사랑, 사랑 자체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으로, 천겹 만겹의 사랑의 주름으로 번져나가는 영화.이들은 욕망하지만 욕심내지 않는다. 짝사랑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 꼬마의 얼굴엔 세상을 얻은 듯 햇살 같은 미소가 어린다. 엘튼 존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팽개치고 자신의 배불뚝이 매니저를 선택한 퇴물 로커. 사랑과 우정의 경계를 그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나 역시 씩씩한 여자친구들을 어설픈 남정네들보다 오만배쯤 사랑한다. 물론 <러브 액츄얼리>는 크리스마스의 주술에 기댄 판타지다. 그러나 사랑으로 사고 친 사람치고 현실적인 인간이 있는가. <블레이드 러너>의 레이첼과 데커드의 사랑은 인간과 복제인간의 경계마저 아름답게 지워나가지 않는가. 아직도 사랑을 믿는 비현실적인 인간들이야말로, 이 순간에도 한삽 한삽 미련스레, 우리를 둘러싼 굳건한 일상의 경계들을 들어올리고 있다. 분명 지지리도 평범한 사랑의 에피소드들이 나를 의뭉스럽게 선동한다. 모든 종류의 불가능한 사랑을, 감히 상상하라고.
1997년. “Nobody loves me.”라는 경구를 가슴에 새기며 20대 초입에 이미 사랑을 포기한 내게, 친구가 덜컥 커밍아웃을 했다. “우리 과에선 네게 처음 커밍아웃한다. 너라면 놀라지 않을 것 같았어.” 난 미안해서 입 속으로만 말했다. ‘놀라긴. 난 커밍아웃에 놀란 게 아니라 커밍아웃이 뭔지도 모르는 내 무지에 놀랐을 뿐.’ “너 그거 아니? 내가 헤테로라면, 그러니까 내가 이성애자라면, 널 사랑했을 거야.” 쿵. “그 사람에게 달려가 고백해. 곧 결혼한다고? 그게 뭔 상관? 네가 얼마나 매력적인데.” 그후 어떤 ‘선수’의 사랑고백도 그의 커밍아웃만큼 나를 한꺼번에 무너뜨리진 못했다.
사랑의 위대함이라면, 자의식의 육중한 갑옷을 벗어던지게 하는 것, 사랑을 핑계로 비로소 나 아닌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내가 되는 것이 아닌지. 너의 간절한 목마름을 읽어내고, 너의 꿈이 나를 통해 흘러가도록, 내가 너의 그릇이 될 때, 이미 더이상 널 가질 수 없음에 슬프지도,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음에 아프지도 않은 나를 발견한다. 사랑을 가질 순 없지만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우리 앞에 널려 있다.
정여울/미디어 헌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