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프레밍거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마릴린 먼로의 뇌쇄적인 매력이 넘쳐났던 <돌아오지 않는 강>이나 웅장한 대작드라마 <영광의 탈출>, 필름누아르의 고전 <천사의 얼굴> 등의 목록이 죽 떠오르는지? 하지만 무려 2시간40분 동안 벌어지는 지난한 법정 공방전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노련한 테크닉이 요구된다. 법을 전공했으며 무대연출가로 유명세를 떨쳤던 오토 프레밍거야말로 법정드라마에 더없는 적임자였던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모호하다. 친하게 지내던 술집 주인 퀼에게 강간당했다고 진술한 여인 로라, 분노로 잠시 정신을 잃고 퀼을 잔혹하게 살해한 로라의 남편 매니언, 돈 때문에 매니언의 변호 의뢰를 받아들인 퇴락한 변호사 폴(만약 제임스 스튜어트가 폴 역을 맡지 않았더라면 이 정도까지의 효과를 낼 수 있었을까? 그는 히치콕의 <로프>나 <이창>에서 보여주었던 모호함, 선한 얼굴 뒤에 숨겨진 어두운 그림자를 다시 한번 발휘한다)까지,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검사와 변호사간의 말의 ‘전쟁’(말 그대로 총칼없는 전쟁!), 강간이나 창녀, 팬티와 브래지어 같은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화되어 토론되는 (당시만 해도) 충격적인 대사들, 그러면서 이 더럽고도 냉정한 법정을 감싸고 도는 듀크 엘링턴의 쿨 재즈 선율…
법정드라마로서는 단연코 걸작의 위치에 오를 만한 형식적 완성도를 보여주지만 그 와중에도 흡사 코언 형제의 누아르를 연상케 하는, 끊임없이 상황들의 부조리한 어긋남에서 비어져나오는 기묘한 유머감각과 앰비언스는 <살인자의 해부>를 쉽사리 판단내리기 힘든 경계선상에 위치시킨다.
김용언
Anatomy of a Murder/ 1959년/ 오토 프레밍거/ 1.33:1 / DD 1.0 / 콜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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