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정치의 심장을 향해 쏴라
군사독재 그린 코스타 가브라스의 <Z> 성공…“기회주의적” 비판도
1960년대 후반 유럽영화의 화두는 단연 정치다. 파시즘에 관한 영화가 기획되는 중이었고, 노동 쟁의나 테러리즘 같은 심각한 사회문제들도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내에서 영화의 ‘정치성’은 조만간 상업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도 했다. 그같은 상업화는 정치가 스릴러를 만나는 순간 이뤄졌고, 성공적이었다.
정치와 스릴러의 결합은 ‘정치영화’ 전공 아닌 스릴러 전공 감독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 65년 <침대차 살인>이란 전형적 스릴러로 데뷔했던 코스타 가브라스는 69년 자신의 스릴러 연출 솜씨에 ‘군사독재’란 정치 테마를 끌어들이고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이브 몽탕이라는 스타의 출연으로 인해 <Z>와 코스타 가브라스는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는다.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인의 암살을 둘러싼 이야기다.
그러나 <카이에 뒤 시네마> 등의 진보적 편집자들은 <Z>를 비롯해 상업성을 띤 정치영화들에 비판적이었다. 68년 이후 <카이에 뒤 시네마>는 정치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느냐에 따라 영화들을 분류하는 데 재미를 느꼈는데, 그같은 스펙트럼 속에서 <Z>는 정치적인 비판을 기회주의적으로 이용하는 영화로 자리매김됐다. 실제 가브라스의 정치스릴러는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상투적인 주류영화의 관습에 빠져 있기도 했다. 그러나 코스타 가브라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주류적 관습 안에서 영화를 찍을 때에만 많은 관객에게 ‘사실’을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관객이 영화가 상영 중일 때 영화를 숙고할 수 있도록 훈련돼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뒤에 프랑스 시민이 된 코스타 가브라스는 원래는 그리스 출신. 영화 에 등장하는 지중해 연안의 나라를 쉽게 그리스로 떠올릴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18살 때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에서 국립영화학교를 나왔고 <태양은 가득히>의 르네 클레망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했다.
등급제, 불황 타개책 될까?
연령 따라 구분된 ‘영화 상품’으로 관객 유혹
TV의 ‘공격’을 극복하고 전성기 수준 영화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1960년대 후반 들어 명백해졌다. 60년대 초중반 <사운드 오브 뮤직> <닥터 지바고> 등 대작들이 대성공을 거두자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블록버스터가 TV의 공격을 이겨낼 대안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68년 영화 <스타>, 바로 전해의 <닥터 두리틀>은 그 길이 잘못된 것임을 일깨웠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 영화산업은 68년 말 기상천외한 해법을 내놓았다. 바로 미국 영화사상 최초의 자발적 등급제다. 그간 영화적 표현의 한계를 정해왔던 ‘헤이스 윤리규정’의 권력은 이미 약화돼 폭력, 섹스, 거기에 신성 모독적인 내용의 영화까지도 상영이 허용되고 있던 상태. 할리우드는 검열이 그처럼 완화되면서 넓어질 대로 넓어진 표현의 영역을 연령에 따라 세분화했고, 영화는 새로운 방법으로 상품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68년 10월9일 미국영화협회(MPAA) 잭 발렌티 회장은 “11월부터 등급제가 시행된다”고 밝혔다. 주(州)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큰 기준은 G(general: 모든 연령 입장), M(mature: 미성년자 관람불가), R(restricted: 16세 이하 관객은 보호자 동반), X(완전성인용) 등의 4개 등급이다.
“할리우드-작가주의영화 다 가라”
남미 영화인들 ‘제3영화’ 선언
라틴아메리카의 영화인들이 독특한 영화문법과 이론 체계로 특유의 ‘정치적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영화를 ‘제3영화’라 부르고 있다. ‘제3영화’의 주축은 아르헨티나의 좌파 페론주의자들인 페르난도 솔라나스와 옥타비오 게티노. 이들은 69년 ‘제3영화를 위하여’ 선언을 통해 자신들의 영화를 이론적으로 규정했다.
‘선언’은 할리우드영화를 ‘제1영화’로 자리매김한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소비하게 만드는 영화가 ‘제1영화’다. ‘제2영화’는 개인적인 표현을 중시하고 작가가 중심이 되는 예술영화들. ‘제3영화’는 거기서 한 걸음 나아간다. 영화를 해방의 무기로 사용한다. 솔라나스와 게티노는 ‘선언’을 통해 “모든 관객을 영화 게릴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두 사람의 ‘선언’은 앞서 68년에 자신들이 제작했던 영화 <불타는 시간>의 이론적 응결이다. 세 부분으로 나뉜 4시간짜리 <불타는 시간>은 작정을 하고 영화 관객에게 토론을 청하고 또 실천을 요구하려는 듯하다. ‘신식민주의와 폭력’을 통해 착취당하는 아르헨티나의 모습을 비추고, ‘해방을 위한 실천’에서 페론주의의 실패를 분석한다. 이어 활동가들과의 인터뷰를 담은 ‘폭력과 해방’을 통해 변혁의 전망에 대해 얘기한다. <불타는 시간>은 편집 측면에서도 할리우드의 관행을 버리고 에이젠슈테인식의 ‘지적 몽타주’로 되돌아갔다. 영화 속에서는 대량 학살과 현란한 춤판이, 그리고 청량음료 CF와 소 도살장면이 부딪치며 사회적인 인식의 깨임을 요구한다.
솔라나스와 게티노 외에 훌리오 가르시아 에스피노자도 69년 ‘미완의 영화를 위하여’란 논문을 통해 남미의 정치적 열망과 영화의 상관관계를 정리하는 데 힘을 쏟았다.
마약 남용으로 사라진 도로시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에서 깜찍한 도로시로 등장했던 주디 갤런드가 올해(1969) 6월 약물남용으로 사망했다. 47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그녀는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신경쇠약과 자살기도, 숱한 소송과 빈센트 미넬리를 포함한 다섯명의 남편 등 굴곡 많은 생을 살았다. 1939년 <오즈의 마법사>를 시작으로 갤런드는 재능있는 여배우의 탄생을 예고했고, 1954년 그녀의 대표작 <스타탄생>(A Star is Born)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퇴락해가는 왕년의 인기배우 노먼 메인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주목! 이 영화
<이지 라이더> -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결정판
1967년에 개봉한 <졸업>(The Graduate)이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와 같은 ‘청춘영화’(youth pix)의 성공에 힘입어 올해(1969)에는 청춘영화의 원형격인 <이지 라이더>(Easy Rider)가 만들어졌다. TV의 승승장구에 위축되어 있던 영화 제작자들이 아마도 청춘영화에서 출구를 찾은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 다룰 수 없는 과감한 주제, 그리고 현재 미국 영화관객의 절반가량 차지하고 있는 16살에서 24살 사이의 젊은 관객군이 이들의 승산에 장밋빛 기대를 품게 하고 있다.올해 가장 성공한 영화 중 한편으로 기록될 <이지 라이더>는 많은 메이저 영화사들을 자극시켜 모방작 제작을 부추기고 있다. 50만달러도 안 되는 적은 예산으로 빅히트를 친 이 영화는, 모터사이클로 미국 횡단 여행을 하는 두 마약 거래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청춘영화는 양식적 실험을 과감히 시도하기도 했는데, 미국 횡단여행을 함께한 록 음악과 마약말고도 전에 없이 충격적인 스타일이 젊은 관객을 매혹시켰다. 그 예가 불규칙한 장면전환이다. 한 장면의 마지막 숏에 있는 몇개의 프레임들이 다음 장면의 첫 번째 숏에 있는 몇개의 프레임과 엇갈리는 식이다. 그리고 고다르가 개척했던 점프 컷도 수용했다. 미국을 횡단하는 히피 짝패 역엔 피터 폰다와 데니스 호퍼가 출연했는데, 피터 폰다는 이 영화의 프로듀서를 데니스 호퍼는 연출을 각각 맡았다.
<내일을 향해 쏴라> - 라스트신서 영원히 멈춘 레드퍼드와 뉴먼
서부의 전설적인 무법자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두 사람을 다룬 영화는 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제대로 된 연기 커플을 만난 적은 없었다. 로버트 레드퍼드와 폴 뉴먼. 69년 조지 로이 힐 감독의 <내일을 향해 쏴라>(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를 통해 두 사람은 과거 스크린에 등장했던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를 깨끗이 잊게 했다.탈진 상태의 두 사람이 볼리비아 군인들을 향해 죽으러 뛰어나가면서 영화화면은 정지했다(freeze frame).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퍼드의 ‘양심적인 무법자’ 연기는 영화사에 영원히 남게 됐다.
과거 두 무법자를 다룬 영화들과의 차별화가 그냥 이뤄졌을 리 없다. 레드퍼드와 뉴먼, 두 주인공의 매력적인 연기도 연기지만, 조지 로이 힐은 그 두 사람을 카메라 앞에 그냥 세우는 법이 없었다. 그들 앞에 무언가 배치하고 중첩시킴으로써 끊임없이 그들에 대한 ‘논평’을 시도했다. 엷은 커튼을 슬쩍 삽입해 신비로움을 강조했고, 그물 모양의 창틀을 끼워넣어 그들의 자아분열을 암시하기도 했다. 스크린 위의 모든 동작을 중지시킨 마지막 장면의 ‘프리즈 프레임’ 역시 괜한 것일 리 없다. 사살당하기 직전, 모든 것을 정지시킴으로써 조지 로이 힐은 레드퍼드와 뉴먼, 서부의 두 무법자가 죽음에 대해 궁극적인 승리를 엮어내도록 주선했다.
영화인들이여 양심과 도덕을 찾아라!
68혁명에 저지당한 칸
68년 5월18일 프랑스 남부 칸, 필름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는 해변의 대극장. 스페인의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의 영화가 막 상영되려는 찰나 일군의 시위대가 무대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외쳤다. “수많은 학생들이 파리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판에 페스티벌은 계속될 수 없다.”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 진보적 영화인들이 이끄는 시위대였다. 그들은 파리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사회변혁 요구를 먼 발치에서만 바라볼 수 없었다. 극장을 점거한 뒤 상영을 물리적으로 방해했고, 그해 칸필름페스티벌은 취소됐다.
칸 취소와 함께 68혁명의 불길은 영화계로 확산됐다. 영화 노동자들은 ‘영화 삼부회’를 조직했다. 기존의 제작-배급-상영 시스템을 뜯어고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갈수록 상품화하고 있는 영화산업의 반동적인 구조를 차단하고 공격하겠다”며 파업을 시작했다. 파리의 국립영화학교 학생들도 뉴스 릴과 팸플릿을 만들어 뿌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본주에 동화된 영화들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킹 암살 추모하는 오스카
칸영화제에 한달 앞섰던 68년 4월의 아카데미 시상식도 쉽지 않았다. 시상식이 열릴 즈음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됐다. 그 탓에 아카데미 시상식 개최는 48시간 늦춰졌다. 매년 시상식 직후 열리던 대규모 무도회도 취소됐다. 킹 추모 분위기는 아카데미 수상작 선정에서도 나타났다. 이해의 중요한 아카데미 상들은 인종차별을 다룬 2편의 영화들에 돌아갔다. 노먼 주이슨 감독의 <밤의 열기 속에서>(In the Heat of the Night)와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밤의 열기 속에서>는 한 지방 도시의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일하게 된 흑인과 백인 형사 얘기를 다뤘다. 시드니 포이티어의 맞수로 노란 선글라스를 낀 채 줄기차게 껌을 씹어댔던 로드 스타이거가 최우수 남우주연상까지 받았다.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결혼문제를 따뜻하게 다룬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캐서린 헵번에게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이 영화에도 흑인 연기자인 시드니 포이티어가 의사로 나왔다.
로만 폴란스키, 맨해튼에 주술을 걸다<악마의 씨>로 할리우드 성공적 데뷔
로만 폴란스키는 현대적 맨해튼 한복판에 중세식 마녀집회 이야기를 끌어왔다. 폴란드 출신인 폴란스키는 할리우드 데뷔작으로 이라 레빈(Ira Levin)의 소설을 각색한 공포영화 <악마의 씨>( Rosemary’s Baby, 1968)를 택했다.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한 그는 여주인공인 로즈마리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재구성해, 관객이 그녀의 임신이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를 점차적으로 깨달아가게 했다. 문제의 아기를 잉태하는 희생양 로즈마리 역으론 창백하고 깡마른, 그러나 뉴욕적인 세련됨이 풍기는 미아 패로가 열연했다.
공간적 배경은 맨해튼에 있는 고딕풍의 아파트 단지. 신혼인 로즈마리 부부가 이곳으로 이사를 온다. 이들은 나이 지긋한 이웃인 루스 고든과 시드니 블랙메르 부부와 친자식처럼 친해지나 고든 부부의 친절한 관심 이면엔 사악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악마주의자들로서, 로즈마리에게 자신들의 제사에 쓸 악마의 아기를 잉태하도록 주문을 건 것. 현명한 로즈마리는 자기에게 걸린 주문을 용케 알아내 빠져나오려 애를 쓰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악마주의자라는 소름끼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재잘거리며 항상 자기를 챙겨주던 고든 부인과 점잖아 보이는 블랙메르, 놀라운 것은 자신의 남편도 이들과 한통속이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녀는 이들이 바라다보는 섬뜩한 분위기 속에서 아기를 낳게 된다.
오싹한 분위기의 뉴욕 다코타 아파트를 배경으로 촬영한 <악마의 씨>는 몽환적으로 흥얼대는 주제음인 자장가 소리와 묘한 대조를 이루며, 현대적인 뉴욕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중세의 마녀집회를 그럴듯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편집인 김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