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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혹스 영화제’, 12월13일부터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개최
김혜리 2003-12-12

장르영화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하워드 혹스 감독은 1896년, 그러니까 영화와 거의 동시에 미국에서 태어났다. 영화산업이 캘리포니아에 터를 잡을 즈음 남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혹스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1차대전에 참전해 비행기를 디자인했고 경주용 자동차도 몰았다. 물론 이 모든 경험은 훗날 영화 소재로 알뜰히 활용된다. 파라마운트의 스토리 부서에서 영화 일을 시작한 혹스는 폭스가 제작한 <영광의 길>로 1926년 감독으로 데뷔해 일흔다섯살까지 일하며 48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혹스에게 처음 작가의 계관을 씌운 것은 앙드레 바쟁을 비롯해 ‘발견’을 즐기는 프랑스 비평가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감독 하워드 혹스의 놀라운 재능을 알아보는 일에 <카이에 뒤 시네마>의 세련된 감식안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다.

장르적 고전미의 달성, ‘작가’배우의 발견

혹스는 갱스터, 누아르, 서부극, 스크루볼코미디,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손대는 장르마다 족족 전범을 창조했다. 그는 음악사에 빗대자면 ‘피아노의 시인’이나 ‘교향곡의 아버지’ 같은 한정된 호칭이 성에 차지 않는 만능의 대가였다. <빅 슬립> <연인 프라이데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레드 리버> 등 혹스의 대표작들은 개성적인 인물, 명료한 플롯, 우아하고 교묘정치한 구조로 좁은 의미의 고전미를 달성했고, 후대에 두고두고 모방, 원용됨으로써 대중 영화장르의 고전으로 추서됐다. 스스로 스토리텔러로 출발한 혹스는 윌리엄 포크너, 줄스 퍼스만 등 우수한 작가들과 협력관계를 구축해 시나리오의 밀도를 유지했다. 배우를 영화의 ‘작가’로 인정하여 존 배리모어, 존 웨인, 험프리 보가트, 폴 무니가 일가를 이루도록 조력했고 몽고메리 클리프트, 로렌 바콜을 발굴했다.

하워드 혹스가 다룬 장르의 가짓수는 웬만한 감독 서넛의 필모그래피를 합친 목록을 능가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혹스가 구현한 세계는 주제와 인물, 테크닉에 있어 완고한 일관성을 드러낸다. 예컨대 혹스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은 대개 그가 보안관이건 신문기자이건 엄격한 노동윤리의 프로페셔널들이며 남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귀는 여자가 없고 외모나 성격이 대조적인 절친한 동료를 거느리고 있다. 혹스의 여자들은 남자의 연인인 동시에 직업적 동반자다. 그녀들이 가장 즐겨하는 말은 “나는 얻기 힘든 여자예요. 당신이 할 일은 나를 원한다고 청하는 것뿐인데 그걸 못해요?”다. 남녀를 불문하고 골초인 혹스의 인물들이 가장 자주 뱉는 대사는 “성냥 있어요?”다. 혹스의 남자들은 말보다 실천을 믿는 행동주의자들인데, 그들의 행동은 따지고 보면 무의미한 세상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실존적 자구책이다.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이 점에 주목해 하워드 혹스와 가장 닮은 예술가로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꼽기도 했다. 이처럼 인간상부터 조명 스타일까지 크고 작은 패턴을 품은 혹스의 영화는 관찰하기에 무척 즐거운 영화들이다. 여성, 역사, 인종을 보는 시선의 시대적 한계마저 흥미로운 체크 포인트다.

갱스터 장르의 골격을 이뤄내다

12월13일부터 2주간 계속되는 시네마테크 부산의 하워드 혹스 영화제는 한 감독의 회고전을 넘어, 지금 우리가 스낵처럼 가볍게 입에 올리는 ‘할리우드영화’의 강력한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만약 연대순의 관람을 원한다면 <스카페이스>(1932, 93분)와 <크라우드 로어>(1932, 85분), <타이거 샤크>(1932, 80분) 중 한편으로 시작해야 한다. 시카고의 갱 알 카포네의 이야기를 모델로 삼은 <스카페이스>는 1931년의 <공공의 적>, 1930년의 <리틀 시저>와 더불어 갱스터 장르의 골격을 완성한 영화다. 일개 행동대원에서 보스를 밀어내는 세력으로 성장한 토니는 여동생 체스카에 대한 과도한 열정으로 말미암아 파멸한다. ‘국가의 수치’라는 부제에다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불법 폭력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촉구하는 영화”라는 머리말까지 달아 건전한 의도를 강조했지만, 영화는 줄곧 무식하고 외로운 갱 토니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알 카포네가 대여섯번을 관람하고 개인 프린트를 소장할 만큼 열광했다는 후일담도 <스카페이스>의 ‘진의’를 곱씹게 한다. 보르지아 가문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혹스는 토니의 남매 관계가 내포한 근친상간의 뉘앙스를 염려했는데 정작 검열관들은 악당의 남매애가 너무 아름답다고 시비를 거는 해프닝이 있었다. <타이거 샤크>(1932, 80분)는 친구를 구하다 한쪽 팔을 잃은 뱃사람 마스카레냐가 부와 사랑하는 여인을 얻지만 다시 비운을 맞는다는 이야기다. 지극히 단순한 남녀의 삼각구도와 운명론을 그리고 있으나, 세련된 대사는 시대를 앞서가고, 무구한 낙천성으로 삶의 흉터를 가리는 에드워드 G. 로빈슨의 연기는, 배우의 퍼스낼리티를 드라마의 깊이로 바꿔내는 혹스의 솜씨를 보여준다.

로맨틱코디미에서 서부극까지

<아기 키우기>(1938, 103분)와 <연인 프라이데이>(1940, 92분)의 드라마를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굴려가는 대사의 리듬과 밀도는 요즘 로맨틱코미디를 유유자적한 한담처럼 보이게 한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하는 <아기 키우기>의 샌님 학자 케리 그랜트는 결혼을 앞두고 부유한 말괄량이 캐서린 헵번의 레이더에 걸린다. 질서와 규율을 중시하던 남자의 세계는 쾌활하고 정열적인 여자의 에너지 앞에서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제목의 아기는 극의 촉매 역할을 하는 표범의 애칭. <연인 프라이데이>는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의 <제1면>을 리메이크한 걸작이다. <모닝 포스트>의 민완기자 로잘린드 러셀은 재혼을 계기로 전업주부로 변신할 것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녀의 전남편이자 편집자인 케리 그랜트는 우수한 인력과 사랑을 동시에 지키기 위해 특종의 미끼를 던진다.

하지만 하워드 혹스가 맺어준 최고의 커플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1944년, 100분)에서 처음 만나 사랑한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일 것이다. 어네스트 헤밍웨이 원작을 자유롭게 각색한 이 영화는 한 여자의 매력 때문에 철저한 삶의 원칙을 무너뜨리고 세상사에 발을 담그는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혹스식의 모럴을 보여준다. 주요 사건부터 피아니스트의 공연까지 <카사블랑카>(1942)의 모작이 아니냐는 험담을 들었는데, 후일 알려진 바로는 본디 <카사블랑카>를 막판까지 준비한 감독은 하워드 혹스였다고 한다. 워너 스튜디오는 보가트와 바콜에 대한 세인의 관심을 식기 전에 이용하고 싶어했고 필름누아르의 고전 <빅 슬립>(1946, 114분)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돈 많은 퇴역장군으로부터 딸의 협박사건 해결을 의뢰받은 냉정한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는 뿌리깊은 애증과 협박, 폭력의 사슬을 발견한다. 플롯이 너무 복잡해 감독도 촬영 중에 각색작가 포크너에게 범인 한명의 정체를 물었으나 그도 몰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레드 리버>(1948, 133분)는 혹스식 서부극의 정수다. 텍사스 황무지에 목장을 일궈낸 던슨은 시장의 변화로 생존을 위협받자 카우보이들을 고용해 소떼를 이끌고 머나먼 여정에 오른다. 양자나 다름없는 개방적인 성격의 청년 매트가 그를 돕는다. 하지만 거듭되는 수난은 이탈자를 낳고, 목표에 집착하는 던슨은 미쳐간다. 긴장의 절정은 <아귀레, 신의 분노>를 방불케 하지만 역시 노련한 연출로 해피엔딩을 끌어낸다. 세대 갈등의 해결 과정은 이상화된 미국 역사 해석에 다름 아니다. <역마차>로 스타가 된 존 웨인이 마침내 배우가 된 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10여년 뒤 만들어진 웨스턴 <리오 브라보>(1959, 140분, 컬러)에서도 직분에 충실한 고독한 사내가 젊은이와 노쇠한 조력자를 이끌고 압도적으로 강한 악당들과 맞선다. ‘실내 서부극’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대화가 많고 1950년 이후 혹스 작품이 흔히 그렇듯 다소 늘어진다. <리오 브라보>와 거의 흡사한 스토리를 우편 비행사의 세계에서 펼쳐 보이는 <천사들만 날개를 갖는다>(1939)는 프린트 수급문제로 일단 프로그램에서 제외됐으나 진행 상황에 따라 추가 상영될 가능성도 있다(입장료 1회 6천원, 문의: 051-742-5377 www.piff.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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