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사랑을 꿈꾸는 소녀의 몸은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소녀가 행복하게 죽기를 바라는 엄마는 돈을 주고 단기(短期)용 ‘불멸의 사랑’을 산다. 영상원 출신 1, 2기 선후배가 감독과 촬영감독으로 만난 <…ing> 현장. 이제는 자신의 수명을 알게 된 소녀가 표정을 감춘 채 운전 중인 엄마를 부르는 장면이다. 기교랄 것도 없이 그저 상황을 담기만 했는데, 나중에 극장에서 보니 화면이 제대로 살아 있다.
빠른 순간 잠시 소녀의 눈에 담기던 절망은, 금세 파란 하늘빛에 묻힌다. 엄마는 모른다. 다행이다. 이렇게 잠시라도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기뻐. 그 순간 촬영감독 김병서(27)는 오감을 바짝 긴장시킨다. 이번 영화 내내 그를 따라다녔던 화두는 ‘자연스러움’. 감독은 발생된 감정, 사랑에 주목하기보다는 사랑이라는 추상명제가 어떻게 일상에서 자리를 잡아가는가를 얘기하고 싶어했다.
이에 김병서는 내밀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과장된 표정이 아닌 자연스러운 몸짓을 갖출 수 있도록 거듭 고심한다. 보호색으로 자신을 감싼 채 다가오는 모든 것들로부터 존재를 감추던 민아가 서서히 몸의 결점과 사랑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순간마다 오히려 그의 카메라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선다. 엄마와 있을 때, 학교에 있을 때, 영재와 있을 때 민아의 내부는 믿음과 수용, 차단과 은폐, 반발과 이끌림이 격렬하게 충돌하는데, 그럴 때마다 카메라는 슬쩍 그녀에게서 떨어져 멀찍이 그녀의 고통과 기쁨을 응시한다. 엄마의 일기장에서 ‘가망 없음’을 알게 된 민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장면, 카메라는 창 밖으로 빠져나가 덤덤히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비출 뿐이다.
과도한 감정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잠깐이나마 등장인물의 격한 감정에 떨리듯 동조하기도 한다. 민아의 병을 알게 된 영재가 입간판을 부수며 오열하는 장면에선, 김병서의 카메라는 아래로 추락했다가 잠깐씩 고개를 들어 영재의 눈매를 비추곤 다시 불안스레 흔들린다. 감정의 지진을 그대로 느낄 것 같다.
밝음과 어두움이 존재하는 <…ing>의 인물들 가운데, 특히 미숙은 이중적인 캐릭터다. ‘보라색’이 메인 컬러인 그녀는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돈으로 사랑을 사주기도 하는 과감성을 지닌 여자다. 도덕적인 결함에 대한 지탄이야 아랑곳하지 않는 모성의 뒷모습을 카메라는 오래도록 담는다. 그 쓸쓸함과 강인한 모성에 대한 경배처럼.
김병서는 얼마 전까지 박광수 감독과 <방아쇠>를 준비하다가, <여섯개의 시선>(박광수편, 정재은편)과 <…ing>를 먼저 찍게 됐다. <버스, 정류장>의 뮤직비디오로 차분한 감성을 화면에 선보인 그는, 얼핏 비슷한 감성을 지닌 <…ing>에서 가능성 있는 화면 결정력을 보여준다. 자연스러움에 대한 고민과 경배는 이제 막 그의 카메라 일기를 다시 쓰게 하는 중이다. 글 심지현·사진 이혜정
김병서 | 1978년생·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2기 촬영 전공·<버스, 정류장> 뮤직비디오 공동 연출, 촬영 · <여섯개의 시선> 중 <얼굴값> <그 남자의 사정> 촬영·<…ing> 촬영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