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장현성)는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일반 회사에 들어갔고, 승진하자마자 회사를 그만둔 뒤 작은 비디오 가게를 차렸다. 아내(오윤홍)는 홀로 고민하다가 남자를 떠났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비디오 가게에서 보낸다. 이름 모를 여자로부터 연애 편지가 날아들고, 테이프를 잘못 반납했다는 혜정(방은진)이 등장한다. 혜정은 죽은 남편과의 추억이 담긴 테이프를 꼭 찾고 싶어하지만, 이미 그것을 봐버린 남자는 왠지 테이프를 돌려주기가 힘들어진다.
:: Review“기다려도 나에게 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나에게 부족한 뭔가를 바라고 집착하는 삶에 만족이 있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신선놀음 같고, 어떻게 보면 사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도 같고. 남자의 과거와 현재에는 별다른 설명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여자들이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하는 반면, 남자는 거의 반응할 뿐이다. 남자에 대해 쉽게 판단을 내리긴 힘들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다른 요소들이 여기 끼어들며 판단을 한층 더 모호하게 만든다. 비디오가 유일한 낙인 어떤 남자의 일상을 보여주는 건 물론 단조로운 작업이다. 영화는 그 단조로움을 상쇄하기 위해 비디오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무언가 하나씩이라도 에피소드를 부여하고자 노력한다.
일상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반드시 지루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일상이야말로 우리의 존재의 근거가 아닌가. 그러나 일상이 지루할 것이라 지레 전제한 채, 자꾸만 사소한 드라마틱한 사건을 수없이 삽입시킴으로써 욕망없는 남자의 삶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누구보다 ‘드라마틱해진다’. 무념무상의 남자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낯선 이와 관계를 맺어가면서 어떤 식으로 달라지고 또한 어떤 식으로 좌절하는가, 그리하여 이 평범한 소시민의 실존은 어떻게 위태로워지는가라는 중심 줄거리는 결국 파편처럼 흩어지는 남자(와 그리고 남자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의 자잘한 사건들을 따라 해체되고 만다.
본래 조각가의 꿈을 키우던 김학순 감독은 종합예술로서의 영화에 뒤늦게 매혹되어 미국 유학길에 올라 뉴욕대와 AFI를 거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비디오를 보는 남자>의 기획, 시나리오, 연출, 편집과 사운드를 직접 담당하며 가능한 한 비타협적이고 수공업적인 작가의 방식으로 데뷔작을 완성하고자 했다. <비디오를 보는 남자>에는 분명 그 진지한 열정이 충만하지만, 오히려 ‘지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좀더 끝까지 고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