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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릴레이] <참을 수 없는 사랑> - 허문영 영화평론가
2003-11-18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돈에 관한 블랙코미디

“사랑은 부끄러운 것도 두려운 것도 아닙니다. 다만… 좋은 것입니다. 난 지금 사랑에 빠졌습니다. 여러분은 냉소하겠지만, 난 이제 빈민가에서 무료변론을 하며 살겠습니다.” 이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연설의 주인공은 이혼 전문 변호사로 이름난 메시(조지 클루니)이다. 그는 이혼으로 재산을 축적해온 요부 마릴린(캐서린 제타 존스)과 사랑에 빠져 고독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몇 굽이의 우여곡절을 더 겪고 둘은 행복하게 결합한다. <참을 수 없는 사랑>의 감동과 교훈은 그러나 모두 가짜다. 메시는 연설 직후에 자신이 마릴린의 음모에 빠졌음을 알게 되자, 마릴린을 죽일 킬러를 고용한다. 결말은 더하다. 두 남녀는 행복한 결합 뒤에 무료변론은커녕 <이혼 예감 쇼-딱 걸렸네>라는 인기 방송의 공동제작자가 되어, 불신과 파경을 선동한다.

<참을 수…>는 유한계급 남녀의 게임에 관한, 그러니까 가진 것들끼리 놀고 있는, 한마디로 가증스러운 영화다. 갑부들인데도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둘의 게임은 멈출 줄 모르고 심지어 서로 죽이려 들다, 마침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결합한다. 게다가 그 둘은 천하의 미남 미녀. 남부러울 것 없이 가진 것들이 인간도 덜 됐는데 사랑의 승리마저 쟁취하는 것이다. <참을 수…>는 또한 엉성하고 진부하다. 유능한 메시가 마릴린에게 하루 만에 이혼소송을 당하는 이유는 전혀 알 수 없고, 마릴린의 사기행각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도 사람들을 속여넘긴다. 무엇보다 마릴린이 결국 사랑의 포로가 되는 경위를 도무지 알 수 없다. 로맨틱 코미디의 생명줄인 감정선이 부실한 것이다. 그런데, 둘은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따라 갑작스럽게 화해하고 결합한다. 두 배우의 미모를 봐서 참는다 해도 이건 몹시 황당한 이야기이다.

실은 그래서 재미있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설득하는 척하면서, 실은 온갖 거짓말과 아이러니로 이 장르에 심술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 코엔 형제는 이야기를 촘촘히 짜가는 게 아니라, 이야기의 틈새를 여기저기 벌려놓고 그곳에서 갖가지 장난에 몰두한다. 열거하기 힘들 만큼 넘쳐나는 그 장난들은 감정적 동화를 지연시키며 드라마의 긴장을 무너뜨린다. 당대의 섹시 가이 조지 클루니에게 동정심을 가질 만하면 그는 어김없이 주접과 방정을 선보여, 관객의 마음 둘 곳을 뺏아간다.

<참을 수…>는 비유컨대 부자가 애창하는 빈자의 노래다. 이건 영화에 나온다. 첫 장면에서 부유한 방송제작자 도노반은 최고급 재규어 위에서 “난 가난한 소년일 뿐이라네, 내 이야기를 알리 없겠지만”으로 시작되는 <더 복서>를 틀어놓고 경박하고 부정확하게 따라 부른다.(그는 며칠 뒤에 알거지가 된다.) 달리 비유하면 결혼식 주례가 부르는 실연의 노래다. 이것도 영화에 나온다. 마릴린의 결혼식 주례 신부는 사이먼 앤 카펑클의 또다른 노래 <에이프릴 컴 쉬 윌>을 부르며 단상에 오른다. “4월에 그녀는 온다네, 시내에 봄비가 흐를 때. 5월에 그녀는 머물겠지, 내 팔에 다시 안겨.” 그가 더 이상 부르지 않는 이 노래의 뒷소절에 따르면 6월에 변심한 여인은 7월에 달아나고 8월에는 죽는다. 크레디트 시퀀스의 애니메이션에선 큐피드의 화살이 심장에 명중하자 심장이 쪼개진다. <참을 수…>는 자신의 꼴을 담은 이런 액자를 자기 안의 곳곳에 전시하는데, 이 또한 코엔의 장난이다.

말하자면 코엔은 빈자의 노래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그 노래를 경박하게 부르는 부자를 보여주는 것이며, 애절한 비가를 들려주는 게 아니라 그 노래를 부르는 주례 신부를 비추는 것이다. 혹은 로저 에버트의 적절한 비유를 빌리면 “꼭두각시는 진지한데 막상 꼭두각시장이는 관객을 보고 빈정대며 ‘당신들, 이거 진짜로 믿는 거야’라고 묻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트릭은 로맨스의 승리를 말하는 척하면서, 실은 돈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살인청부를 한 메시는 마릴린이 거액의 유산 상속자가 됐음을 알게 되자 구출에 나서며 한마디 외친다. “사랑하는데, 돈도 많잖아.” <참을 수…>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를 심술궂게 뒤튼, 돈에 관한 블랙코미디다. 그러니, 너무나 코엔 형제다운 영화다. 허문영/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