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영화들 가운데 <카트린 부인은 어디에?>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한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삼아 카트린이란 노파의 시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작은 소동을 그린 희극이었다. 심장마비로 죽은 카트린 부인의 시체는 죽기 직전 그녀와 파티 중이었던 에릭이란 사내에 의해 엉겁결에 땅에 묻혔다가 이후 에릭과 그의 친구들에 의해 다시 파내어져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에릭과 친구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의 시체는 마을의 화가 지망생 소년에게 발견되지만 우연히 공사장 땅 속에 묻혀 마침내 사람들의 눈앞에서 영영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 밖에도 꽤 많은 수의 인물들이 등장해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엮어가는 이 영화에서 사실 위와 같은 줄거리는 대단한 것이 못 된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줄거리 자체보다는 일종의 맥거핀적인 대상이라 할 시체의 존재/부재가 유발하는 여러 상황에 인물들이 반응하는 방식이었다. 생각건대 이 영화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이례적 걸작’ 가운데 하나인 <해리의 소동>으로부터 아이디어의 많은 부분을 끌어왔음이 분명하다(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아주 만족스러운 수준의 영화는 아니었다).
<해리의 소동>은 <시민 케인>의 작곡가인 버나드 허먼이 히치콕과 작업한 첫 번째 영화이자 여배우 셜리 매클레인의 영화 데뷔작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어느 날 한 작은 마을의 산 위에서 낯선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근처에서 사냥 중이던 앨버트는 그가 자신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것이라 생각하고 당황하는데, 때마침 곁을 지나던 중년의 미혼여성인 그레이블리 여사는 앨버트를 신고하려 들기는커녕 사건을 눈감아주기로 약속한다. 얼마 뒤 죽은 사내의 이름이 해리이며 또한 그는 마을에서 어린 아들과 단둘이 살고 있는 로저스 부인의 전남편임이 밝혀진다. 이후 영화는 인물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해리의 시체를 묻고 파기를 반복하게 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려낸다.
슬라보예 지젝은 <해리의 소동>을 두고 예외야말로 보편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임을 보여주는 영화적인 사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분명 <해리의 소동>은 더할 나위 없이 히치콕적인 요소들로 가득한 영화이지만 그것이 일견 예외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까닭은 여기서의 인물들이 히치콕적 상황에 부합되는 통상적인 반응의 양식을 취하지 않는 인물들 즉 지나칠 만큼 정적인 인물들이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구되는 과정, 예컨대 기나긴 모험으로 특징지어지는 물리적 운동(<파괴공작원>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이나 죄의식의 게임으로 특징지어지는 심리적 모험(<나는 고백한다> <누명 쓴 사나이> <열차의 이방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죽은 해리의 시체를 앞에 두고 수다를 떨어댈 뿐이다. 이때 어쩌면 히치콕의 또 다른 영화 <로프>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해리의 소동>에서 히치콕이 별다른 서스펜스 효과에 기대지 않는 대신 인물들의 재치있는 대사와 상황의 충돌이 빚어내는 희극적 효과, 좀 달리 말하자면 무척이나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소하게 여기며 전혀 심각하지 않게 반응하는- 이른바 ‘understatement’- 인물들에 의해 유발되는 유머를 전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은 분명 두 영화를 다른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때 <해리의 소동>을 히치콕 스스로가 자신의 영화세계에 대해 내린 자의식적이고 유머러스한 논평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하다. 예컨대 히치콕의 영화가 죄의식에 관한 탐구라고 보는 이젠 다소 고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견해가 있는데, <해리의 소동>은 사실 히치콕에게 중요한 것이 심리적이고 내면적인 현상으로서의 죄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비인칭적이고 상징적인 죄의식에 관한 유물론적 탐구라는 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때로 해리의 죽음이 누구에 의한 것인지를 궁금해하기도 하지만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책임이나 죄의식의 문제를 들먹거리진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기이하고 이상적인 공동체에서 인물들의 그러한 태도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공동체를 우리는 어떤 식의 잉여가치의 창출도 불가능한 공동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 각각의 작은 소망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자신의 그림 전체를 백만장자에게 넘겨주는 화가 샘 말로의 행위가, 묻히기를 거부하고 자꾸 되돌아오는 해리의 시체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상태로 되돌려놓는 인물들의 행위와 겹쳐 보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죄의식 또한 타자- 여기서는 해리의 시체- 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해리의 소동>을 통해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되는 가장 히치콕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The Trouble with Harry1955년, 99분, 컬러감독 앨프리드 히치콕출연 에드먼드 그웬, 셜리 매클레인화면포맷 16:9오디오 돌비디지털 2.0지역코드 3출시사 유니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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