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렉 이건의 <쿼런틴>은 사립탐정일을 하고 있는 은퇴한 테러 전담 경관 닉이 병원에서 갑자기 실종된 여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으며 시작된다. 어떻게 보면 뻔하디 뻔하다고 할 수 있는 하드보일드 추리물의 도입부이고 이건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우선 쓰기가 쉽고 진짜 추리소설에서는 굉장히 뻔한 장르 공식이라도 SF와 같은 다른 장르와 결합하면 그 진부함이 쉽게 감소되기 때문이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이건의 안전한 선택은 오히려 최선이다. <쿼런틴>에서 이야기의 독창성이나 힘, 캐릭터의 개성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닉의 캐릭터나 그의 고민, 실종된 여인을 찾아나서는 그의 수색은 점점 무게를 잃고 독자들 역시 그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이 소설이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다른 데 있는데, 만약 정말로 독창적인 스토리 라인이 이 소설에 따라주었다면 오히려 독자들의 시선은 엉뚱한 데로 분산되었을 것이다.
닉의 수색을 따라가는 독자들이 초반에 진짜로 관심을 가지는 건 정신지체자인 여성이 어떻게 철통같은 병원 경비를 뚫고 바람처럼 사라졌는가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궁금하긴 하겠지만 그런 것에 신경쓰기엔 독자들을 압박하는 정보들이 너무 많다. 닉을 안내인 삼아 이건은 엄청난 정보들을 빼곡하게 담은 21세기 중엽의 세부 묘사 속으로 독자들을 집어던진다. 신은 디테일 안에 산다고 누가 그랬던가? 아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신은 <쿼런틴>에도 살 것이다.
이건이 그리는 21세기 중엽의 지구는 첨단기기들이 가득 찬 대형 장난감 상점과도 같다(업그레이드 병에 걸린 독자들은 미리 주의하시길. 책장을 덮기도 전에 심각한 갈증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주인공 닉은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첨단기기들을 다룰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그런 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 세계는 장난감들이 지나칠 정도로 많다. 처음 등장할 때마다 상품명과 가격이 따라붙은 이 기기들에 대한 작가의 열광은 종종 스토리와 당위성까지 갉아먹는다. 종종 닉은 사립탐정을 위장한 쇼호스트 같다. 다행히도 그가 소개하는 장난감들은 대부분 흥미진진하다. 특히 나노 테크놀로지로 연결되어 인간의 욕구와 자유의지까지 조종하는 다양한 신경 모드들은. 이 소설이 단순한 장난감 가게로 끝나지 않은 이유는 이건이 사용하는 장난감들이 어느 순간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사고를 멈추는 추상적인 공간까지 숨어들어오기 때문이다. 신경 모드는 단순한 편리함의 추구가 형이상학적인 사고와 만나는 지점에 놓여 있다. 이건은 이런 변화에 조건반사적으로 질겁하는 대신 냉정한 과학자적인 관점에서 그 변화를 탐구한다.
사이버펑크 시대를 거쳐온 독자들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할 법한 이 난잡한 장난감 가게를 반쯤 헤매다보면 독자들은 양자 역학과 연관된 새로운 세계와 마주치게 된다. 전형적인 사이버펑크물처럼 시작되는 이 이야기엔 안 어울릴 것 같은 엉뚱한 설정이 하나 삽입되어 있다. 닉의 모험담이 시작되기 30여년 전에 명왕성 궤도 두배나 되는 거대한 검은 구체 버블이 갑자기 나타나 태양계를 완전히 감싸버렸던 것이다. 닉의 모험담은 앙상블이라는 수수께끼의 단체와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버블의 비밀과 연결되고 곧 SF 역사상 가장 뻔뻔스러운 허풍과 연결된다. 처음 이 아이디어를 읽고 놀라지 않았다는 걸 뻐기고 싶은 독자들은, 양자 역학의 기본 이론들에 대해 몇번 생각해본 사람치고 이런 상상을 해보지 않은 적 있겠냐고 덤덤한 척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라. 정말 이런 식의 막 나가는 아이디어 전개를 당연한 척하며 전개하기가 쉬운 일인지. 결국 이 모든 건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다. 누가 먼저 하느냐가 중요하고 그 무언가를 먼저 하기 위해선 엄청난 담력이 필요한 것이다.
<쿼런틴>은 다양한 사고실험들을 가득 담은 상자와 같다. 어떤 것들은 대담한 물리학적 추론이고 어떤 것들은 흥미진진한 사회학적/기술적 예언이며, 어떤 것들은 자유의지와 같은 비교적 전통적 형이상학적 대상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나노 테크놀로지의 티끌만한 세계에서 우주 전체의 운명까지 커버하는 이건의 세계는 성실한 하드 SF가 커버하는 범위가 얼마나 넓을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극중 인물 중 한 명인 포콰이는 “1980년대 이래, 형이상학은 실험과학이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하드SF는 그 실험과학을 가상으로나마 커버할 수 있는 가장 쓸 만한 도구인 셈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사족 하나. 21세기의 발달될 대로 발달된 세계의 비전을 그린 소설 속에 여전히 남자주인공에게 존댓말을 올려붙이는 여자들을 보는 것처럼 어색한 일은 없는 듯하다.) 듀나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