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News & Report > News > 국내뉴스
<고독이 몸부림칠 때> 촬영현장
2003-09-30

조연이 주연이고 주연이 조연이여

“(주현에게)선생님은 작대기 내리시고 낭패스런 표정 아시죠. (양택조에게)선생님은 뛰어오시던 숨가쁜 호흡 그대로 유지하시고, (김무생에게)김 선생님은 회심의 미소 지으시고. 표정만 갖고 갑니다. 슛!” 이수인(41) 감독은 ‘선생님’이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이 감독보다 20살 남짓 많은 배우들이 잘 따라준다. 영화 촬영장답지 않게 분위기가 부드럽고 소탈하다.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주현, 김무생, 송재호, 양택조, 선우용녀, 박영규 등 중견·원로배우들이 주·조연 할 것 없이 비슷한 비중으로 나오는 앙상블 코미디이다. 영화에서 주현, 김무생, 송재호, 양택조 넷은 시골 한 마을에서 자란 친구다. 그렇게 쌓인 정이 어지간할까. 김무생이 옆에 앉은 주현을 가리키며 말한다. “이런 친구 한명 죽으면 같이 죽고 싶은 거지. (실제로도 친하시냐고 묻자) 그럼, 몇십년을 같은 길을 걸어왔는데.” 촬영장에서 이 원로배우들이 틈만 나면 서로에게 핀잔 주고 농담하는 모습은 영화의 안과 밖을 구별하기 어렵게 했다.

지난 26일 경기도 화성군 타조 사파리 농장의 촬영분은 중달(주현)과 진봉(김무생)의 대결과, 찬경(양택조)이 이 소식을 듣고 말리러 뛰어오는 장면이었다. 며칠 전 진봉은 중달 없는 사이 집에 들어가 수석을 박살내고 동물박제를 냉장고 안에 처넣었고, 진봉은 밤에 중달의 타조농장 울타리를 열어 타조가 도망치게 했다.(노인이나 아이나 싸울 때 하는 짓거리는 똑같다.) 이날은 아무도 없이 단둘이 마주 섰다. 엽총을 겨누는 진봉 앞에서, 몽둥이를 들고 찾아간 중달이 기가 죽어 돌아서는 장면에 이어, “중달아” 하고 외치며 달려온 찬경이 싱겁게 끝나버린 현장을 목격하는 순으로 촬영이 이어졌다. 중달이 돌아서는 대목에서, 주현과 김무생이 양택조에게 분위기 잡게 “중달아”를 불러달라고 주문했다.(이 소리는 이 장면에 안 들어간다.) “왜 안 불러줘”(김무생) “불러달라고 해야 불러주지.”(양택조) “심통이야, 심통.”(김무생) 곧이어 찬경이 뛰어오는 장면을 찍었다. “다시! 감정이 안 좋아. 이게 그림 좋으려면 (50m 가량 떨어진 언덕길을 가리키며) 저기서부터 뛰어오게 해야 해.”(김무생) 찬경이 뛰어와선 멀쩡히 서 있는 둘을 헐떡거리며 바라보는 장면(화면엔 찬경만 잡힌다)에선, 양택조가 분위기 잡게 주현과 김무생에게 맞은편에 서 달라고 주문한다. “자기는 불러줬다 이거지” 하며 둘이 서슴없이 카메라 뒤쪽에 서준다.

주현은 즉석 대사변주(애드리브)가 탁월했다. “오늘은 엄마 제삿날이라 참는다만 내일부터 내 눈에 띄었다간…”까지 하다가 그 뒤 대사를 틀리자 바로 “니 울 엄마 덕본 줄 알아라” 하고 애드리브를 넣는다. 모니터를 보면서 자신이 한 애드리브를 듣고는 “거, 대사 좋네” 하더니 다시 찍을 땐 일부러 그 말을 살려 넣는다. 촬영이 90% 가량 진행된 이날까지의 강행군에도 불구하고 주현과 양택조는 건강해 보였다. 김무생은 “오래 전 드마라 찍을 때 겨울바다에 들어가면서 다친 폐”가 재발한 탓에 조금 지쳐 보였지만, 그래도 농담을 자주 하며 촬영장의 분위기를 띄워준다.

<고독이 몸부림칠 때>는 제목처럼 고독이 몸부림치는 영화가 아니다. 사건이라기보다 이벤트에 가까운 몇가지 일들과 함께 흘러가는 시골 노인들의 일상을 코믹하게 엮는다. 시나리오를 보면 찰진 대사로 웃는 사이 사이에 싸해지는 순간을 곁들이는 리듬을 갖추고 있고, 상황연출은 극적이되 작위적이지 않다. 대중적이면서도 ‘고독’이라는 감정을 거리를 두고 여유있게 볼 수 있게 해주는 고급스런 감흥을 의도하고 있다. 이날의 현장 분위기 같다면 그 의도가 살아날 것 같다. 이 감독은 20년 가까이 연극연출을 해오다 이 영화로 데뷔한다. “편집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따금씩 불안하다. 시원스럽게 오케이 했는데 뒤에 보면 컷들이 잘 안 붙을 때가 있고…. 저 타조들 보면 한편으론 우습고 한편으론 슬프지 않은가. 이 영화도 그렇게 보였으면 싶다.” <고양이를 부탁해> <장화 홍련>을 제작한 마술피리의 세번째 영화로 내년 초 개봉이 목표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사진 마술피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