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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감독 엘리아 카잔 잠들다
2003-09-30

‘상처뿐인 영광’, 미국의 엘리아 카잔 감독이 뉴욕 맨하탄 자택에서 28일 숨졌다. 향년 94.

카잔은 브로드웨이에선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와 함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 수많은 걸작을 만들어낸 연출자이자, 할리우드에선 말론 브랜도, 제임스 딘, 캐롤 베이커, 나탈리 우드 등 무명의 스타를 ‘배우’로 발굴하고 <신사협정><워터 프론트><에덴의 동쪽> 등 영화사에 남을 수많은 작품을 감독한 거장이었다.

하지만 매카시 광풍이 몰아치던 1952년 미국 의회 반미행위조사위원회에 소환돼 자신이 1934~36년 공산당원이었음을 고백하고 8명의 당원의 이름을 댄 이후, 그에게는 평생 ‘배신자’라는 꼬리표와 논란이 따라다녔다. 카잔은 처음엔 이름 대기를 거부했지만, ‘당신의 명성을 무너뜨리겠느냐’는 회유와 협박 속에 증언을 선택했다. 그는 <워터 프론트>(1954)로 재기에 성공한다.

“갑자기 아무도 내 정치적 관점이나 논란을 신경쓰지 않았다. <워터 프론트> 이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뭐든지 하게 됐다. 그게 할리우드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생 그 상처는 아물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스인 부모 사이에서 1909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예일대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브로드웨이의 활약을 거쳐 <브루클린에서 자라는 나무>(1945)로 데뷔한 그는 20세기 폭스 데릴 자눅 사장의 ‘명작 브랜드 정책’에 힘입어 승승장구한다. <신사협정>(1947), <거리의 혼란>(1950) 등 그의 초기작은 필름 누아르 스타일과 사회파 리얼리즘의 태도를 결합한 영화였다. 그는 할리우드에 연극의 전통을 끌어들였고 스크린에 미국인의 거칠고 방황하는 삶을 옮겨온 장본인이자, 할리우드를 지배할 ‘메소드 연기’(배우가 역할에 몰입해 완전히 역할과 같은 성격의 연기를 하는 것)의 산실인 액터스 스쿨의 수장이기도 했다.

아카데미 위원회가 그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하던 지난 1999년 식장은 카잔을 둘러싼 논란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상징한 현장이었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과 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그에게 찬사를 보내며 기꺼이 상을 전달했지만, 에드 해리스나 아서 밀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박수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않고 차가운 눈길로 지켜볼 뿐이었다.

<워터 프론트>에서 말론 브랜도가 맡은 퇴역 복서 출신 테러 멀로이는 부두 노동조합의 깡패집단을 정부에 고발한 뒤 밀고자로 몰리자 단신으로 조니를 찾아가 주먹싸움을 벌인다. “난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아”라고 외치는 테리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카잔의 자기 변명처럼 느껴졌다. 한때 거대권력에 맞섰지만 끝내는 협력했던 자신의 고독한 처지를 웅변하려는 듯 보였다. 그리스인 출신으로 언제나 자신을 ‘아웃사이더’라 느꼈던 카잔에게 그 느낌은 더했으리라. 하지만 확신에 차 있었던 듯 보이던 카잔은,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한 행동은 바른 것이었다. 하지만 정의로운 것이었을까”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