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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 되는 건 없어, 베푼만큼 가져간다!
권은주 2003-09-24

건달 <오! 브라더스>를 보고, 유아적 탐욕과 유아적 의존에 빠진 현대인을 질타하다

<레드>에는 인상적인 한 인물이 등장한다. 평생 혼자 살면서 이웃의 사생활이나 염탐하며 사는 초로의 남자. 그는 한때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판사였다. 이성의 투명한 힘을 믿어서 법으로 사회를 정화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사랑을 숭고한 열정으로 생각해서 그 힘으로 영혼을 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그는 사랑을 열정의 레드와 순수의 화이트로 채색했고, 궁극적으로 핑크를 욕망했다. 하지만, 연인이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장면을 목격한 이후 모든 인간관계에서 회색밖에 보지 못하는 정신적 안질을 앓게 된다. 그렇게 평생을 보낸 그는 급기야 타인의 눈에 비치는 천연색 세계를 질투해서 재를 뿌리고 싶은 심술까지 생긴다. 이쯤 되면, 사연을 모르는 이웃의 눈에 이 남자는 벽에 핀 곰팡이 같은 존재다. 그러나 본인은 억울할 거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사랑한 죄밖에 없는데….”

나는 30대 초반까지는 이런 사람의 처지에 공감했다. 당한 것도 억울한데, 세월이 지날수록 심성까지 찌그러지니 얼마나 억울한가! 발병이 나도 바람피운 여자가 나야지 왜 당한 놈이 두고두고 고통을 당해야 하나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캐릭터를 보면 연민보다 짜증이 앞선다. 그 이유는 이렇다. 이 남자는 고상한 듯하지만 사실은 남들이 하나도 갖기 어려운 걸 두개나 동시에 갖고자 욕망했다. 단 한번의 열정적 사랑도 겪지 못하고 사망하는 인간들이 숱하다. 또 대부분의 사람은 숭고한 사랑은 근처에도 못 간다. 그런데, 이 남자는 숭고한 열정을 꿈꿨다. 숭고함과 열정이 도대체 어울리는 조합이기나 한가. 남녀 사이의 열정은 에로스의 발호 아닌가. 그리고, 숭고함은 설산에서 육체를 죽이면서 고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종교적 관념의 세계가 아닌가. 물과 기름처럼 불화하는 두개의 욕망을 한 여자를 통해 얻으려 했던 이 남자는 화살이 나가는 총을 사달라고 어머니를 조르는 어린아이와 뭐가 다른가. 이 남자의 ‘상처’는 사실 여자가 준 게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거다. 그 여자가 한 짓이라고는 애인보다 섹시한 남자와 한번 동침한 게 전부다. 남자가 열정에만 몰입했다면 애인의 정부와 경쟁하려는 의욕을 보였을 것이다. 또, 남자가 숭고에만 몰입했다면 연애 작파하고 수도원 들어가서 고행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남자가 취한 태도는 평생을 혼자 살면서 이웃집 남자의 불륜현장이나 염탐하는 것이었다. 그는 숭고한 열정이 아닌 다른 사랑을 상상하지 못했고, 또 스스로 그것을 만들려는 실천보다는 누군가 완제품을 갖다주기를 기다렸다. 기획할 때는 유아적인 탐욕에서 못 벗어났고, 실천할 때는 유아적인 의존에서 못 벗어났다. 그러니까, 그의 상처는 인간에 대한 진지함 때문이 아니라 최고의 물건을 비용을 들이지 않고 공짜로 갖겠다는 공정거래 의지의 박약이 초래한 게 아닌가. 그는 이 공짜 욕심 때문에 한 인생을 허비하는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야 천사 같은 여자를 알아보는 눈을 갖게 되고, 비로소 누군가에게 먼저 베풀 수 있는 어른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이건 지독한 아이러니다.

<오! 브라더스>의 주인공은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를 원망하며 성장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도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한다. 그에게 일탈은 좌절된 사랑의 충족에 대한 집요한 기다림의 포즈 같은 거다.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의 정량을 채워달라고 떼를 쓰고 있는 게다. 이건 유아상태다. 그는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아버지의 범죄의 흔적인 조로증 걸린 동생에게 정을 베풀면서 그는 아버지를 흘려보내고 어른이 된다. 자연은 새끼 이외에는 사랑을 주지 않는다. 사랑은 물처럼 조건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게 제격이다. 그런데 로맨스영화의 주인공들은 낮은 곳에 아예 틀어박혀 이리로 와달라고 떼를 쓰는 인물들 일색이다. 결혼에 가로놓인 교환의 경제에서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기 위해 사랑이라는 서사에 의존하는 인물들 말이다. 이런 유아적인 탐욕과 유아적인 의존 정서에, 성인의 모습이라고는 합리적인 간지밖에 없는 인물들이 소비주의의 세례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 자유란 단어를 혹사시키며 나이들도록 쾌락과 안락의 기회비용을 계산하는 버릇을 신중한 사랑의 기다림이라 말하겠지. 남재일/ 고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