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신문 제20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김재희
1950 ~ 1951
일본영화의 발견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일본영화가 세계 영화계에 화려하게 등극했다. 1951년 9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 장 르누아르의 <강>, 엘리아 카잔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을 제치고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또한 <라쇼몽>은 이탈리아 평론가상도 함께 수상했다. 물론 일본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다자카 도모타카 감독의 전쟁영화 이 1938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문화장관상을 수상했지만, 이는 파시즘 국가간에 주어진 의례적인 상이었다.
<라쇼몽>의 수상은 일본 영화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라쇼몽>이 1950년 일본 개봉 당시 비평과 흥행에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터라 놀라움은 더욱 컸다. 누구보다 제작사인 다이에이 경영진이 이 영화를 못마땅해했다. 다이에이 사장은 제작 초기부터 이 영화에 대해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고 완성된 영화에 대해서는 난해하다고 불평했고, 이 영화를 제작하자고 제안한 회사 중역 및 제작자는 강등됐다. 사실 다이에이가 <라쇼몽>을 제작하기로 결정한 건 순전히 ‘저렴한 제작비’에 혹해서였다. 이미 다른 스튜디오에서 2번이나 퇴짜맞은 시나리오를 들고 다이에이를 찾아간 구로사와는 필요한 세트는 문과 법정 안뜰뿐이라서 저예산 촬영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 외로 세트 제작비가 많이 들었고 이 또한 다이에이 경영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사정이 이런지라 이탈리아 영화인 지울리아나 스트라미지올리의 추천으로 <라쇼몽>의 베니스 출품이 결정됐을 때, 다이에이는 베니스에 제작진을 보내기는커녕 감독인 구로사와에게 출품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다. 따라서 시상식날, 영화제 집행위원회 사람들이 베니스 시내에서 찾아낸 동양인이 수상을 대신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라쇼몽>의 수상은 구로사와에겐 ‘행운의 반전’을 가져올 기회가 될 것 같다. 구로사와는 <라쇼몽>에 이어 쇼치쿠에서 제작한 <백치>까지 실패한 데다 다이에이가 차기작 제작 제의를 철회하자 낙담에 빠져 있었다. 그는 그런 좌절감을 달래기 위해 낚시를 갔다 집으로 들어서던 길에 수상 소식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20년 만의 화려한 외출
루이스 브뉘엘 <잊혀진 사람들>로 칸영화제에서 감독상 수상
잊혀졌던 감독, 루이스 브뉘엘이 <잊혀진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다. <잊혀진 사람들>로 1951년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브뉘엘은 멋지게 컴백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황금시대>로부터 무려 20년 만이다.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1930년 프랑스에서 만든 <황금시대>의 소동을 뒤로 하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브뉘엘은 1932년 우르데스라는 산악지역으로 달려가 다큐멘터리 <빵없는 대지>를 찍었다. 절대적인 빈곤과 무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곳 주민들의 삶을 그린 이 다큐멘터리는 스페인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바람에 상영이 금지됐다. <빵없는 대지>는 1936년에야 공개가 가능했다.
그뒤 그는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한다. 그래봤자 영화계 언저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긴 하지만. 파리의 파라마운트에서는 2년간 더빙작업을 했고 스페인의 워너브러더스에서는 공동 제작을 감독했다. 그러던 브뉘엘은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화당 정부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부의 명령을 받고 할리우드로 간다. 기술 고문으로 스페인공화국에 관한 영화 제작을 감독하라는 지시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끝났고 그는 친구도 일자리도 없이 미국에 남은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간신히 뉴욕 현대미술관에 큐레이터로 취직했으나 1942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해고됐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미군이 만든 영화의 스페인어판 해설가로 고용돼 생활을 연명했다.
이렇듯 오랫동안 메가폰을 놓았던 그는 1946년 멕시코로 이주하면서 ‘행운의 반전’을 맞는다. 그는 멕시코인 프로듀서 오스카르 단시헤르스의 요청으로 남미로 간다. 그리고 1947년 감독 복귀작 <그랑 카지노>를 내놓지만 실패한다. 하지만 단순 유쾌한 코미디 <난봉꾼>이 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그의 야심작인 <잊혀진 사람들>에 착수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에 개봉된 이 영화는 그의 옛날 영화처럼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멕시코 수도의 슬럼가에 사는 10대들의 불량스런 삶을 적나라하게 그린 이 영화는 “멕시코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난을 샀다. 그 여파인지 단 4일간 극장에 걸릴 만큼 흥행에서도 참패했다. 하지만 칸영화제 수상으로 상황은 역전돼 <잊혀진 사람들>은 재개봉에 들어갔다.
할리우드 300명 퇴출
반미조사위 청문회 재개…공산주의 혐의자 줄줄이 캐내
1951년 말, 재개된 반미조사위원회(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 이하 HUAC) 청문회 결과 공산주의자로 밀고된 300여명의 영화인이 소속 스튜디오에서 해고되었다. 이들은 또한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것이 금지된다. 이 명단에는 대시엘 해밋, 줄르 다신, 조셉 로지, 폴 무니, 존 가필드 같은 작가, 감독, 배우들이 포함되어 있다.
HUAC의 새 의장인 존 우드는 지난 봄, 45명의 비우호적인 증인을 불러 청문회를 재개했다. 그리고 그해 말까지 계속된 청문회에서 110명이 증언했고 그들 중 58명이 공산당 당원임을 고백했다. 이렇듯 이번 청문회의 분위기는 1947년과 사뭇 달랐다. 당시 할리우드 10으로 찍힌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서 해고된 데 이어 구속 수감까지 당하는 걸 지켜본 새 증인들은 대부분 HUAC에 협력했다. 시나리오 작가인 마틴 버클리는 무려 155명의 공산주의 혐의자를 댔고 감독 로버트 로슨은 54명, 배우 리 제이 콥은 20명, 감독 엘리아 카잔은 11명을 고해바쳤다.
한편, 할리우드 10의 한 사람인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은 이번 청문회를 ‘재기’의 기회로 삼았다. 곧 그는 지난 4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요량으로 청문회에 출두해 24명의 전직 공산당원의 이름을 댔고, 몇주 뒤 킹스 브러더스에 다시 일을 시작했다.
블랙은 들러리인가?
레나 호른, <쇼 보트> 여주인공 역할 에바 가드너에게 밀려
흑인 여배우 레나 호른이 절친한 친구 에바 가드너에게 고배를 마셨다. 1951년 <쇼 보트>의 여주인공 역할은 가드너에게 돌아갔다. <쇼 보트>는 1946년작 <구름이 지나갈 때까지>의 ‘쇼 보트의 줄리’ 이야기를 토대로 하는 MGM의 새 뮤지컬. 그때 줄리로 출연한 배우가 호른이었기 때문에 호른은 당연히 여주인공에 캐스팅되리라 기대했지만, MGM은 흑인 분장을 한 에바 가드너를 출연시키기로 결정했다. 호른으로서는 몹시 씁쓸한 일이다.
레나 호른은 흑인으로는 드물게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여배우다. 한때 출연진 전원이 흑인인 흑인영화들이 제법 만들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흑인단체들의 압력으로 정부가 할리우드에 흑인배우를 더 많이 고용할 것을 촉진한 덕이었다. 흑인 집사들의 핀업걸이었던 호른은 <폭풍우> <하늘의 오두막> 같은 영화에서 진가를 발휘해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2차대전 뒤 흑인배우를 고용해야 하는 의무가 해이해지자 흑인영화는 사실상 제작이 중단된다.
특히 스튜디오들은 남부 백인 관객의 눈치를 살피느라 흑인배우의 출연을 자제시켰다. 남부의 검열관들은 흑인이 품위있게 그려지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했다. 유모, 하인, 매맞는 바보여야 봐줄 수 있었다. 호른이 맡았던 유혹적인 미녀 역할은 그나마 흑인 여배우에게 주어진 최선이었다. 호른은 그 이상을 원했다. 인종이 혼합 캐스팅된 영화에서 진지한 배역을 맡고 싶어했고 제작사가 자신을 2류 취급하는 데 반발했다. 하지만 차별의 벽은 견고했다. 1940년대 호른은 “나는 할리우드에 있었지만 흑인인 까닭에 할리우드의 구성원은 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점점더 잔인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어깨:<선셋대로>의 빌리 와일더 감독 인터뷰
“관객이 보지 못하는걸 들려줘야”
독일에서 나치 집권 뒤 할리우드로 건너왔던 감독들은 유난히 필름누아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로버트 시오드막, 오토 프레밍거, 프리츠 랑, 막스 오퓔스 등 필름누아르의 수작들 다수가 이들 손에서 나왔다. 빌리 와일더도 여기에 속하는 감독으로 그는 <이중배상>(1944), <잃어버린 주말>(1945)에 이어 1950년 <선셋대로>를 내놓았다. 여느 누아르영화처럼 <선셋대로>에도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서 연원하는 스타일의 기운이 넘쳐난다. 이건 의식적인 것일까, 무의식적인 것일까? 그와의 인터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독일 감독들을 만나면 으레 하는 질문인데, 독일 표현주의가 당신 영화 패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감독은 영화마다 다른 스타일로 작업한다. 나는 한 종류의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히치콕이 그러하지 않는 것처럼. 패턴 같은 건 모른다. 우리는 ‘이 영화는 무슨 장르’ 따위로 구분하지 않는다. 스타일은 그냥 서체처럼 자연스럽게 나온다. 다만 매번 재미있고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할 뿐이다. 서체처럼 스타일이 발전할 수도 있지만, 그건 무의식적인 거다.
그래도 영화를 시작할 때는 독일의 표현주의 운동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그건 그냥 우리가 사는 환경이었다. 베를린은 그런 도시였다. 우리는 초기 갱스터영화에 나오는 세트에서 사는 것 같았다.
독일 감독들마다 다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의식하진 않았다고 해도 무의식 중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글쎄, 그럴 거다. 하지만 50명의 작가, 50명의 감독, 50명의 접근법이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집에 돌아온 남편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보는 장면이 있다고 치자. 감독마다 작가마다 다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방식으로 그려낼 것이다. 내 영화가 다 다르길 바란다. 같은 영화를 만드는 건 지루한 일이다.
당신이 <이중배상>에서 일인칭 화자를 내세워 성공한 뒤 이는 할리우드에서 하나의 유행이 됐다. 제대로 된 내레이션을 쓰는 건 쉽지 아니다. <선셋대로>에서 죽은 내레이터라는 설정은 이야기를 경제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내레이션을 쓰면 20분 동안 보여줘야 할 걸 2줄로 전달할 수 있다. 내레이션을 쓰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기술들을 잘 모른다. 관객이 이미 보고 있는 걸 내레이션으로 전달한다면 실수다. 내레이션은 새로운 것, 다른 면을 들려줘야 한다.
그나저나 세실 B. 드밀 같은 거물이 어떻게 <선셋대로>에 출연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스튜디오 사장이 부탁하고 돈도 듬뿍 주었으니까. 그의 하루 출연료가 1만달러였다.
단 신 들
영화 월간지 <카이에 뒤 시네마> 창간
1951년 4월 프랑스에 영화전문 월간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창간됐다. 앙드레 바쟁, 자크 도미올 발크로즈, 로 두카가 공동 편집장을 맡은 <카이에 뒤 시네마>는 <레뷔 뒤 시네마>의 편집방침을 따를 것으로 보인다. 1929∼31년 발행됐던 <레뷔 뒤 시네마>는 유럽의 예술영화, 아방가르드영화, 미국영화 감독들을 주요하게 다뤘고, 1946년∼49년 재발행됐을 때도 필름누아르를 중심으로 한 미국영화, 네오리얼리즘에 큰 비중을 두었다. 애초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에 내정됐던 사람도 <레뷔 뒤 시네마>의 전임 편집장 장 조르주 오리올이었다. 하지만 그가 1950년 자동차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편집장이 교체됐다. 앞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에는 젊은 평론가들이 대거 합류할 예정이다. 바쟁과 절친한 평론가 프랑수아 트뤼포가 기고하고, <카이에 뒤 시네마> 창간에 참여한 에릭 로메르를 매개로 ‘카르티에 라틴 시네클럽’에서 함께 소식지를 냈던 자크 리베트, 장 뤽 고다르도 합류하기로 했다. <선셋대로>의 글로리아 스완슨이 표지를 장식한 창간호는 오리올에게 헌정됐으며, ‘영화언어의 진화’에 관한 바쟁의 글 등이 실렸다.
주디 갤런드 “이렇게 사느니…”
1950년 6월20일 할리우드 여배우 주디 갤런드가 자살을 시도했다. 갤런드는 유리 조각으로 목을 그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다행히 가족들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최근 주디 갤런드는 깊은 침체에 빠져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로 단박에 스타덤에 오른 주디 갤런드는 연이어 MGM의 뮤지컬에 출연했는데, 기분을 고조시키고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약물중독 증세는 점점더 심해졌고 그에게서 비롯되는 실수를 보다못한 MGM은 그와의 계약을 철회했다. 또한 갤런드는 남편인 빈센트 미넬리와도 별로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도 ‘빨갱이 사냥’
1950년 여름 일본 영화계에서도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이른바 대대적인 ‘빨갱이 사냥’이 벌어졌다. 연합군총사령부(GHQ)는 도호, 쇼치쿠, 다이에이 등 세 회사를 중심으로 공산주의자 및 동조자 색출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감독인 고쇼 헤이노스케, 이마이 다다시 등 137명의 영화인이 추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