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모니터를 확인한 뒤, 김래원이 목소리를 깔며 이언희 감독에게 정중하게(?) 요구한다. 윗집 소녀 민아(임수정)에게 치근덕대다 경비 아저씨에게 들켜서 놀라는 장면이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짬이 나면 휴대폰을 들고 어디에다 전화하기 바빴던 김래원은 자정이 넘어 촬영이 시작되자, 감독이 괜찮다는데도 “찜찜하다”면서 ‘한번 더’를 외친다. 허약하고 새침데기인 민아에게 마음을 뺏긴 사진학과 대학생 영재 역을 맡은 그가 카메라 앞에 다시 서는 동안 이언희 감독은 동시녹음을 맡은 이상준 기사에게 “준비되시면 스피드 콜 주세요” 한다. “이번에 011로 드릴까요?” 이 기사의 농에 스탭들의 웃음이 터져나오는 동안 여름밤 <…ing> 촬영현장은 잠시나마 긴장을 푼다.
9월1일 분당의 한 빌라촌. 이날은 <…ing>의 22회차 촬영이 진행되는 날. 이 감독은 마음을 닫은 여고생과 건들거리는 늙다리 대학생의 그저 그런 멜로가 아니라 ‘관계맺기’에 관한 영화라고 설명한다. 두 남녀 외에 모두 포커스 아웃되는 앙상한 영화는 아니라는 것이다. 민아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친구 같은 엄마(이미숙) 캐릭터가 도드라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귀찮다는 듯 손사래치며 도망을 가면서도 이 감독은 “누구나 다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나. 여고생 민아 또한 커다란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데, 영재를 만나게 되면서 외부세계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지게 된다”면서 ‘성장영화’의 줄기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영상원 1기 출신으로 <고양이를 부탁해>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등의 각색을 맡았던 이 감독은 자신을 밀봉해버린 채 살아온 민아에게 영재가 한걸음 다가서는 이날 촬영 분량을 두고 “초여름 밤 미풍이 살랑거리는 느낌이 담겼으면 한다”고 덧붙인다.
매사 시무룩한 딸에게 “연애 좀 해 보라”며 충고하는 친구 같은 엄마 역의 이미숙과 함께 오전부터 촬영에 들어갔던 임수정은 새벽 3시가 다 돼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간단한 분장을 끝내고 나서 헤드폰을 낀 채 담배 한 개비를 물고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 촬영에 들어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딴청을 피운다. 현재 전체 분량 중 40% 정도 촬영을 마친 <…ing>는 튜브엔터테인먼트가 투자, 배급하고, 창립작으로 윤종찬 감독의 <소름>을 내놓았던 드림맥스가 제작한다. 11월21일 개봉예정. 사진 오계옥·글 이영진
♣ 이언희(가운데) 감독은 모든 스탭에게 존대말을 쓴다. 혹시 나이 때문? 1976년생인 이 감독은 또 한명의 20대 데뷔 감독이다. 박광수 감독의 <빤스 벗고 덤벼라>를 찍기도 했던 김병서 촬영감독 또한 앳된 모습의 20대. 나란히 입봉하는 두 사람 모두 그러나, 현장에선 영감 소리 들을 만큼 신중하다. (왼쪽 사진)♣ 간단한 야외 씬 촬영인 것 같지만, 각종 필터를 단 조명기가 복잡하게 배치된 촬영현장. 특히 30미터가 넘는 크레인 위에 달린 젬볼(jem ball)이라는 특수조명은 나무와 민아의 방의 주색인 그린 톤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오른쪽 사진)
♣ 19살 소녀 민아(임수정)는 어릴 적부터 병원 신세를 져왔다. 학교에 나가지만 외톨이를 면치 못하는 신세. 엄마 몰래 담배를 피는게 낙이라면 낙이다.(왼쪽 사진)♣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사진학과에 다니는 영재(김래원)가 민아 집 앞에서 펼치는 엉뚱하고 황당하고 요란한 세레나데. “옥탑방에 살던 경민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나이가 좀 많고 정신적으로도 좀 성숙한 캐릭터”라는게 김래원의 영재 소개.(오른쪽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