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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형제여,끈끈한 듯 낯선, <오!브라더스>의 이정재&이범수
사진 이혜정박혜명 2003-08-20

오, 브러더스라. 그런데 별로 형제 같지 않다. 친형제가 아니므로 당연하겠지만, 이정재이범수는 여러모로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든 사람들이다. 스튜디오로 들어서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어깨를 드러낸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들어선 이정재는 소파에 앉으면서 먼저 주위를 살피는 반면, 이범수는 멀리서도 눈에 확 띄는 빨간 추리닝 바지에 회색 티셔츠를 한 세트로 갖춰 입고 와서는 윗도리 얼마 아랫도리 얼마 하며, 싸게 샀다고 자랑한다. 여기에 영화사 관계자가 귀띔해준 바에 따르면, 평소 말수가 많지 않은 이정재는 있는 자리도 가려 가지만, 스톱사인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발화(發話)량이 무한대로 뻗어가는 이범수는 없는 자리도 만들어내 사람들을 모으는 타입이란다.

그런데 본래 형제끼리는, 외모나 습관을 빼고 닮은 구석이 별로 없는 법이다. 큰애가 욕심이 많으면 작은애는 양보에 익숙해지고, 애교 많은 누나 밑에서 자란 동생은 상대적으로 뻣뻣한 성격을 갖게 된다. 영화 <오! 브라더스>에서 이복형제로 엮인 이정재와 이범수가 잘 어울려 뵈는 것도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이 상반된 기류를 가진 탓이 있을 것이다. 이범수는 “형 상우가 동생 봉구를 나무라면서 때리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우리 두 사람의 호흡이 정말 잘 맞는 걸 느꼈다”고 말한다.

사실 두 사람은 촬영장에서 슛이 들어간 순간을 제외하고는 “정재씨”, “범수씨”라며 꼬박꼬박 존칭을 덧대 부르는 사이다. 이렇듯 툭 터지지 않고 지속됐던 낯섦 혹 긴장감은, 이정재가 말한 대로 “내가 준비해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내다보고 준비도 더 많이 해오는” 상대배우의 열의 때문일 수도 있고, 5년 전 <태양은 없다>에서 주·조연이었던 관계가 주연이란 대등한 관계로 달라지면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 묘한 긴장감 속의 호흡은, 결과적으로 상우와 봉구의 관계를 영화 속에서 생생하게 만들어냈고, 이제 두 사람은 전작 이후로 하지 못했던 혹은 그보다 더 전의 이야기들까지도 나누기 위해 상대 기자와 각각 마주앉았다.

“실패보다 변신이 중요하다”

청년의 속을 채우는 것이 꿈과 의욕이라면, 이것이 다 털어질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젊었을 적 예상과 다른 현실, 혹은 그런 현실에 대한 인식이 꼭꼭 눌려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꿈을 묻는 건 무의미해 보일 때가 많다. 그런 면에서 데뷔 9년차 배우 이정재는 애늙은이 같았다. 웬만한 질문에는 대부분 심드렁해져서, 내일모레면 몇십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장래희망은 왜 물으실까 하는 표정으로 그는 쌍꺼풀 없는 눈을 한층 가늘게 접곤 했다. 카메라 앞에서 웃는 모습은 9년 전의 TV드라마 <느낌>에서처럼 여전히 환했지만, 이야기를 싣고 나온 그 목소리가 껄끄러운 혀를 굴러나오다 혓바닥 위로 몇번쯤 걸려 넘어진 듯 들렸다.

“옛날에는 인기나 욕심, 이런 것만 있었는데 사실 나도 상업적인 배우니까 흥행에도 신경써야 한다는 거 알죠. 남의 돈으로 영화 찍으면서 책임은 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너무나 부담스러운데, 그게 어쩔 수 없는 내 위치인 것 같아요.” 이것이 다름아닌 ‘심드렁’의 원인이었다. 거침없이 장래희망만을 말할 수 있는 젊은이의 순진함이나 어리광 따윈 더이상 통하지 않을 시점에 와 있다는 사실 말이다. 너무 일찍 데뷔한 탓에 그만큼 빨리 이쪽 세상의 생리를 알아버린 서른한살의 영화배우 청년은, 혹시 정신적인 ‘조로증’을 앓고 있는 건 아닐까.

전작 <오버 더 레인보우>까지 열두편의 영화를 찍어오는 동안, 이정재는 분명 배우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눈빛만으로 모든 사태를 일갈할 수밖에 없었던 백제희가 이젠 바로 떠오르지도 않을 만큼. 영화의 흥행은 종종 그의 옆구리를 비껴갔을지라도, 보장된 퀄리티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스타성 배우로서 큰 하락세는 없었다. <오! 브라더스>의 캐릭터 ‘상우’도 이 가치를 깎아내리고 있지 않다. 그런데 유독 자기 혼자만 또 다른 이상한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내가 무슨 대단한 배우라고… 제가 한 게 뭐가 있어요. 한석규 선배처럼 한국영화의 관객 수를 확 끌어올리는 영화를 했던 것도 아니고, 문제작을 했던 것도 아니고, 해외영화제에서 상받을 영화를 했던 것도 아닌데.” 그의 짧은 한숨이 순간, 아버지들의 그것과 비슷하게 들렸다. 제 이름 석자로 혹은 능력으로 영화의 흥행이나 가계를 책임져야 할 때이지만, 막상 뒤를 돌아보면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손에 집히는 게 별로 없어서 저도 모르게 뱉어지고 마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가족들이 위로할지라도 아버지 스스로의 생각을 뒤집기는 어렵듯, 네임밸류 센 젊은 배우의 고집도 꺾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게 무기력인지도 몰랐다. 바람이나 욕심을 섣불리 내지르기엔 이미 많은 책임을 알아버린 조숙한 아이가 제 할말을 조금씩 남겨놓는 것처럼, 뜨거운 기대는 죄다 증발시키고 말았다는 투로 그는 스스로를 계속 빈털터리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정재의 자연적인 나이는 이제 서른을 갓 넘기고 있을 따름이다. 온갖 복잡한 생각으로 머릿속을 어지르고는 지쳐서 벌렁 누워버릴 때가 아니라는 걸 자기 자신이 모를 리가 없다. 열세 작품을 하기까지 연기에 관한, 배우로서의 자의식에 관한 어떤 짜릿한 순간도 맛본 적이 없다는 그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노력으로 찾아오든 갑자기 쇼크처럼 다가오든 나한테 오긴 올 텐데, 그게 언제 어떻게 올지는 알 수 없는 거고… 그런 게 설레고 기대되긴 해요.” 어느샌가 웃는다. 심드렁하던 그 표정이 딸랑, 하고 소리날 것 같은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기다림의 시간을 노력으로 더 압축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여러 작품, 여러 캐릭터들을 하는 것에는 그런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유도 있어요. 변신이 잘됐건 아니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봐요. 변신이 잘 안 됐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바꾸는 게 낫다고 보는 거죠.” 이정재의 심드렁함, 혹 조로 증세처럼 보였던 건 어쩌면 엉터리 진단에 불과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너무 늦게 찾아온 사춘기 증세와 많이 닮아서, 새파란 청년의 열정적인 호흡을 늙은이의 한숨으로 잘못 들었던 것도 같다.

기죽지 않는 씩씩함, 혹은 천진함

웃음소리가 먼저 들렸다. 빨간 트레이닝 셔츠에 맨발, 주변이 캄캄해지도록 그을은 피부. 산책 나온 것처럼 헐렁한 차림의 이범수는 낯선 스튜디오가 오래 전부터 자기 자리로 정해져 있었다는 듯이 편하게 앉아 웃고 있었다. 주인보다도 더 주인처럼 보였지만, 그뒤에선 오래 인정받지 못했던 재능이 살짝,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전엔 내가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코미디 연기를 많이 한다고 그것만 봤던 거지. 그런데 나는 막나가는 코미디는 한번도 한 적 없어요. 이번 영화 <오! 브라더스>도 마찬가지고.” 눈밑에 잘게 새겨진 서른몇살의 잔주름이 그 억울한 마음의 흔적이었을까. 그러나 이범수는 “힘들 때일수록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버티면서 자신을 다독여왔다. 오만하다고 오해받더라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도록. “이면이 없는, 액면 그대로를 믿을 수 있는 인간”이고 싶어하는 이범수는 “내 안에 천진함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오! 브라더스>의 봉구를 연기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했다.

이범수는 “봉구는 천진한 눈망울이 가장 중요한”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나이는 열두살, 외모는 삼십대 중반. 조로증에 걸린 꼬마 봉구를 연기하기 위해서 초등학교 4학년 수업을 참관하기도 했고, 집 근처 초등학교 꼬마들이 집에 가는 모습을 면밀히 관찰하기도 했지만, “눈동자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범수는 시나리오를 받아들고선 자신을 돌아봤다. 나이를 먹었지만, 그래서 많이 작아졌겠지만, 내 마음 어딘가엔 아직 먼지를 타지 않은 아이 같은 부분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고. 그리고 발견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나를 보호하고 남을 밀쳐내면 행복하겠어요? 차라리 난 상처받는 편을 택하겠어요.” 남자다운 고집과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이 사이좋게 섞여 있는 배우. 많은 이들이 <정글쥬스>의 덜떨어진 양아치나 <태양은 없다>의 음산한 깡패, <하면 된다>의 어눌한 촌놈으로 이범수를 기억할 뿐이다. 그러나 이범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잘 들여다봐야 하는 사람이다. “너무 답답해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 알리는 광고를 만들어볼까 하는데”라며 농담을 던지지만, 그 농담에는 곧은 뼈가 심지를 세우고 있다.

단역과 조연으로 보낸 세월이 12년. 그 시간이 흐르고서야 이범수는 <정글쥬스>로 당연히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던 주연이 됐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맨발로 뛰어왔다”. “판에 박힌 조연을 계속 하면서 편한 길을 가고 싶은 욕망도 있었지만” 그리고 “불량과자처럼 달기만 한 나쁜 영화 시나리오도 많이 받아 봤지만” 버릴 수 없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우는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범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는 영화는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몽정기>에 출연하면서 스스로 촌스러운 노총각 선생님의 모습을 택했다. 그 편이 인간답기 때문이었다. <오! 브라더스>의 봉구를 연기하면서도 신파로 흐르지 않도록 열심히 자신을 다스렸다. 열두살 꼬마라면, 당연히 그렇게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식인이라며, 영화에 책임을 져야 한다며, 그는 자신과 다른 배우들에게 온갖 짐을 다 얹어주려 들었다.

그늘에 묻혀 있던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이범수는 벌써 다른 영화 촬영에 들어갔다. 신작 <안녕! 유에프오>에서 그가 연기하는 인물은 시각장애인을 사랑하는 버스 운전사. 그가 가지고 있는 “순박한 심성”을 드러내는 영화가 될 것이다. “동네 슈퍼에 들러 하드 하나 사 가지고 빨아먹으면서 걸어갈 때 행복하다”는 순박한 이범수를. 어디선가 비닐봉지 가득 하드를 담아들고 슬리퍼를 끌고 있는 그를 만난다면, 이 사람 지금 행복하구나, 믿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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