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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당신은 진정한 장인이십니다
2003-08-11

이성춘 촬영기사 8월4일 타계

지난 8월4일, 임재영 조명기사님으로부터 이성춘 촬영기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오랫동안 앓아오신 암으로 최근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는 얘길 얼마 전에 들었는데, 드디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그날 밤 11시가 넘어 빈소를 찾았다. 예상보다 훨씬 한가한 분위기였다. 10년 넘게 그분 밑에서 촬영부를 이끌었던 변희성 기사님(<비천무> <와일드카드> 등 촬영)을 비롯, 몇몇 낯익은 얼굴이 보일 뿐.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무슨 영화사 대표 부친상에도, 무슨 배우 모친상에도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드는데, 한국 영화계의 원로 촬영기사 본인의 장례식장이 이리도 쓸쓸할 줄이야. 연락과 장례절차를 맡은 촬영감독협회의 어수룩함으로 탓을 돌려야 하는 건지, 영화 대선배들과 현역 젊은 후배들간의 의사소통 부재를 원망해야 하는지 언뜻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성춘 촬영기사님을 처음 뵌 게 90년 김호선 감독의 <사의 찬미> 때였다. 나는 이 영화의 제작사 기획실장으로 작업에 참여했는데, 크랭크인 당시까지도 연출부가 채 꾸려지지 않아 부랴부랴 떠난 첫 번째 일본 로케 현장에서 스크립터 겸 연출부로 기획실장인 내가 동원되는 웃지 못할 일이 생겼다. 현장기록을 하고, 소품도 체크하면서 촬영현장을 지키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일본 유학길에서의 첫날밤을 찍는 날이었는데, 추운 3월의 날씨에 당시 윤심덕으로 분한 장미희씨는 내내 속옷 차림으로 그 장면을 촬영해야 했다. 이성춘 촬영기사님이 갑자기 나를 불러세웠다. 카메라 위치와 이동점검을 위해 내가 장미희씨 대신 방바닥에 누워 있어보라는 거였다. 연신 ‘미스 심 미스 심’ 하시면서…. 할리우드식 유식한 말로 나는 그날 주연배우의 ‘보디더블’이었던 셈이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나는 열심히 보디더블 역할을 하고, 기록장도 채워가며 밤을 꼬박 새웠다. 매니저도, 감독 의자도, 의상 코디네이터도, 연출부도 없는 10여명의 조촐한 촬영현장이었지만 새내기인 나에겐 경외감이 들 만큼 엄숙하고 진지했으며, 그 분위기는 뜨거웠다.

10여일의 첫 일본 로케가 끝나고, 이후 제대로 모든 스탭들이 꾸려지고 나는 잠깐 동안의 연출부 일을 접었다. 이성춘 기사님은 그뒤 내가 연출부 막내인 줄 알고 그랬다고 정색하며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뒤 기획실장의 자격으로 촬영장에 들를 때마다, 현장에서 가장 나이드신 그분이 그닥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과묵하신 편이고 소탈하셨고 또한 열성적이셨다.

그 당시로 치면 꽤 오랫동안 촬영이 진행되었는데, 60이 넘은 몸을 이끌고 불평 한마디 없으셨다. 손수 낙엽들을 긁어모아 바닥에 뿌리고, 보시고, 또 뿌리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이 영화로 대종상영화제 촬영상을 수상하는 기쁨도 누리신 걸로 안다.

대체로, 내가 그분에게서 느낀 건 영화사 대표와 감독들에게 사교적으로 굴거나, 비즈니스적 마인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 소박한 ‘장인정신’으로 일관한 ‘수줍은 영화인’의 모습이었다. 6·25전쟁시 종군기자로 활약한 바 있는 이성춘 기사님은 57년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으로 영화촬영을 시작하셨다. 대표작으로는 1960년 권영순 감독의 <흙>,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자녀목>(1984), <연산군>(1987), <청송으로 가는 길>(1990), <사의 찬미>(1991) 등이 있다. 주로 정소영 감독, 고영남 감독, 정진우 감독, 이두용 감독들과 작업을 했고, 한국 촬영계의 거목 정일성, 유영길 촬영기사님도 한때 그분 밑에서 영화를 찍었다.

특히, 영혼 결혼식을 한 뒤 겁간을 당하고 쫓겨난 다음 다시 양반댁의 씨받이를 하고는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로 조선의 지배계급 제도를 비판한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시카고국제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하기도 하셨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는 기록을 남겼다. 이 영화에 대한 매체의 언급을 발췌해보았다.

“움직임을 충분하게 소화하기 어려운 촬영장비상의 난점을 다양한 미장센으로 극복하려는 시도가 우선 눈에 띈다. 실내의 공간을 이용해서 다양한 프레임 짜기, 조명을 통해 대각선을 비롯한 프레임 분할하기, 밋밋한 배경 안에 감정이 풍부한 배우의 얼굴 클로즈업, 극단적인 조명의 대조를 통해 만들어낸 실루엣 화면, 매혹과 냉정함이 교차하는 공간 포착. 이 작품은 오늘날 평론계와 국제영화제의 강력한 이슈 중 하나인 이른바 ‘한국적 영상미’의 기원과 계보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상 <씨네21> 이두용 감독 인터뷰 기사 중에서

그와 작업을 함께한 <공동경비구역 JSA> <텔미썸딩> <정사>의 임재영 기사는 “조명을 제대로 아는 촬영감독이었으며 진정한 한국 촬영계의 ‘어른’이라며, 앞으로 나서지 않는 겸손함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변희성 기사는 “후배들에게 언제나 공부하는 자세를 강조하셨으며, 영화에 대한 확실한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언제나 하셨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한 작품 더 꼭 해야 하는데…”라며 현장을 그리워하셨다는 이성춘 기사님. 비슷한 시기에 시작하신 서정민 촬영기사님이나, 전조명 촬영기사님이 아직도 수십년 아래의 젊은 감독들과 함께 영화를 만드시는데… 아쉬울 따름이다.

경쟁적으로 어느 영화의 박스오피스 성적이 어떻고 어느 배우가 얼마를 받고, 누가 누구와 연애를 한다는 이 생생한 ‘현실’에만 매달리는 그 많은 저널 그 어디에도 한국 영화계의 소중한 한 사람이었던 이분에 대한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아! 단 한 매체에, 단 한줄 이렇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이성춘 촬영감독협회 촬영감독 별세. <한국경제>-심재명/ 명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