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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재담으로 감싸인 탁월한 서사,분투 끝에 구입한 <야후>

일간신문의 만화담당 기자를 만났다. “윤태호씨의 <야후>가 20권으로 완간되었는데, 작가와 대담 한번 하시죠.” 순간 머릿속에 우아한 포즈(이를테면 낙엽이 지는 거리를 걷고 있는)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좋죠.” 짧게 답했다. 꽤 시간이 흐른 뒤 전화가 몇번 오가고 날짜가 잡혔다. 7월16일. 흔쾌히 약속을 잡았다. 다시 <야후>를 읽기 위해 책장을 뒤졌더니, 몇권이 빠진다. 16권부터는 아직 사지 못했다. 각각 2개의 공간으로 분리된 만화책장을 뒤져 이빨을 맞춰도 빠지는 권수가 많다. 다음날, 시내 대형 서점의 만화코너를 찾았다. K서점. 없었다. <야후>가 없었다. 그보다 만화매장이 더 넓다는 Y서점. 있다. 하지만 역시 이빨이 빠져 있다. 뒷부분 몇권을 채웠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온라인 서점에 접속했다. 먼저 제일 큰 온라인 서점이다. 있다. 그런데 막상 주문을 하니, 5일 이후나 배송이 가능하단다. 이런. 취소했다. 출판사에 전화를 해서 빠진 부분을 보내달라고 할까 고민하다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다. 어차피 평소에 책 한권 보내주지 않던 출판사 아닌가? 차라리 속 편하게 내 돈으로 사서 보자. 기왕에 있는 책들도 내 돈으로 산 거니까. 결심한다. 다음날 저녁 다시 만화출판사와 오너가 같은 인터넷 서점에 접속했다. 최소배송일이 안 나온다. 내심 역시 다르다고 안심하고 주문을 넣는다. 7월11일에서 12일로 넘어가는 새벽. 12일이 토요일이니 늦어도 15일에는 받아보겠지라고 안심한다. 다음날, 내 주문목록을 보니 ‘재고 확인 중’이다. 불안하다. 다시 13일. 일요일이니까 포기한다. 14일, 또 ‘재고 확인 중’이다. 15일 변함없다. 어쩔 수 없이 몇년 만에 대여점을 찾았다. <야후>가 없다. 시장이 소화할 수 없는 물량을 단지 대여점 유통만을 믿고 찍어내는 타성에 젖은, 그래서 만화를 하급의 문화로 전락시키는 대여시스템(대여점이 아니다!)의 왜곡된 모습은 소장하고 있는 만화책의 타이틀만으로도 확연하다. 우리 동네의 유일한 대여점에는 명백히 중·고생만을 겨냥함직한 일본 만화만이 빼곡했다. 한밤중에 다른 대여점을 찾는다. 없다. 꽤 먼 시간을 헤매다 대여점을 찾지 못하고 포기하고 만다. 많은 물량의 만화를 대여를 통해 소비하는 대여시스템의 만화는 다른 대체 엔터테인먼트의 등장에 무척이나 취약하다. 몇년 사이에 부쩍 대여점 숫자가 줄었다. 개략적인 산출이지만 최고 호황기에 2만개를 넘던 대여점이 1만개 수준으로 줄었다고 한다. 1994년 도서대여점이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시작한 만화대여점은 10년 만에 급속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게다가 그 속도도 꽤 빠르다.

19, 20권을 보지 못해 김현과 신무학이 월드컵경기장에서 죽는다는 핵심만 전해 들은 상태에서 15개의 질문을 만들었다. 다음은 제일 인상 깊었던 질문과 대답.

“<야후>가 대표작이 되었지만, 윤태호 작가가 처음으로 상업잡지에 등장한 스타일은 굉장히 유머러스한 지점이었다. <혼자 자는 남편> <연씨별곡> <수중가>와 같은 <미스터블루> 연재작들은 해학적인 만화들이었다. 이를테면 해학적인 농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계보적으로 보자면 고우영 선생의 만화에 꽤 가깝게 가 있는 만화들이었다고 본다. <야후>와 같은 하드보일드한 SF와 이런 해학적인 작품들과 작가의 취향은 어느 쪽인가? 물론 내 취향은 해학적인 만화들이다”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야후>를 그리기 위해서 1권부터 다시 쭉 읽어야 한다. 그래야 시나리오가 나온다. 하지만 <발칙한 인생>은 밥 먹다가도 시나리오가 나온다”는 대답이었다. 역시, 윤태호가 보여주는 가장 탁월한 장점은 고우영과 강철수를 섞어놓은 듯한 그 탁월한 풍자와 재담의 향연이 아니던가. 김진태가 명랑만화의 선에서 슬랩스틱과 시추에이션을 이어간다면, 70∼80년대 성인만화(고우영의 <삼국지> <수호지> <초한지> <서유기> <가루지기전>의 질펀한 해학과 농담이나 강철수의 <팔불출>의 풍자)를 이어가는 이는 바로 윤태호다.

<야후>를 둘러싼 정황 중 가장 불만스러웠던 사건을 물어보았다. “20권으로 기획된 <야후>가 단행본 3권쯤 나왔을 때, 문화관광부에서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줬다. 그때 무척 당황스러웠다. 20권짜리 만화라고 작가가 공공연하게 이야기했는데,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도입부만 보고 상을 주는 것인가? 누구도 <야후>가 20권으로 종료되는 장편이라는 점을 몰랐던 것인가? 과연 그들이 만화에 대한 이해가 있는가? 라는 회의가 들었다”라는 질문에는 “나도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때가 막 결혼한 시점이라서 기분은 좋았다”라고 대답했다.

7월16일, 인터뷰를 하는 장소에서 모든 것을 고백하고 남은 19, 20권을 읽었다. 7월23일 책을 주문한 지 12일 만에 <야후>가 도착했다. <야후>가 한국 만화사에서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가상역사만화, 구조적 모순, 내면의 트라우마와 구조적 모순의 만남 그리고 그것을 엮어가는 작가의 탁월한 서사능력. 윤태호는 의도적으로 80년대 만화방 만화의 빛나는 서사를 차용해 선굵은 이야기를 완성했다. 이런 만화라도 한권이 나올 때 발빠르게 사두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형편이 한국 만화의 오늘이다. 그러니 새로운 독자가 형성되지 않고, 있는 독자들도 떠나는 것이다. 좋은 시절 만화로 돈을 번 만화출판사들이여! 보고 싶은 만화를 손쉽게 사서 볼 수 있게 해달라. 대여점 때문에, 경기 때문에 만화출판사가 어렵다는 핑계는 그만 집어치우고 독자입장에 서서 한번이라도 생각해보라.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가 최근에 완간한 작품 하나를 사서 보기가 이렇게 힘든데, 어디 만화독자 하겠는가? 한달에 수백권씩 일본 만화 찍어내는 데 사운을 걸지 말고 제발 눈을 좀 돌려보시기를.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m